‘이대 나온 여자’들이여 ‘김활란 동상’에 올라가라

게시판 흔한에러 ‘이대 나온 여자’들이여 ‘김활란 동상’에 올라가라

  • 만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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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eek #2520

    g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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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들만 입학허가를 내 주는 한국의 대표 사립대학, 梨花여자대학교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오늘 퍼온 기사는 아앰피터라는 이름을 가진 블로그의 글을 오마이뉴스에서 발굴하여 기사화 한 것을 제가 읽고 여기에 옮겼습니다. 이 글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는 이화여대의 아킬레스일겁니다. 또한 찬송가 한 장을 복사하여 답변글에 올리겠습니다. 목록의 이글 밑에 달린 답변 글도 꼭 읽으시어, 지금까지 속아 살아온 것은 어쩌는 수 없다 치더라도 남은 인생 더 이상은 속고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원문 -> http://impeter.tistory.com/2196

    이화여대생들이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총장의 친일행적에 문제를 제기하며 교내에 설치된 김활란 동상 철거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대생들은 5월 30일 이화여대 본관 앞에 설치된 김활란 이대 초대총장의 동상에 철거를 요구하는 포스트잇을 붙이는 플래시몹을 했는데, 3미터 높이의 동상에는 얼굴까지 300여장 이상의 포스트잇이 붙여졌습니다.

    이대생들의 김활란 동상 철거 포스트잇 붙이기 행사는 2주 전 한 학생이 인터넷 게시판에 ‘김활란 동상 철거요구 포스트잇붙이기’라는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습니다. 학생의 제안에 많은 학생들이 호응했고, 제안을 알리는 패널을 준비하며 재학생은 물론이고, 졸업생까지 참여했습니다.

    학생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학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가 5월 30일 오후 6시쯤 포스트잇을 모두 철거했습니다.

    왜 이화여대생들은 자신들의 초대 총장 동상, 그것도 3미터 높이까지 올라가 포스트잇을 붙였을까요? 결론은 간단합니다. 그녀가 보여준 인생이 이화여대생들에게 치욕스런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김활란의 어떤 인생이 그녀들에게 치욕적이며 부끄러우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친일 여성의 대모, 김활란’

    김활란은 대한민국 여성 1호 박사입니다.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신여성으로 존경과 부러움을 받던 그녀의 인생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바뀝니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조선을 전쟁 기지화 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때 김활란은 조선총독부의 훌륭한 친위대였습니다.

    김활란은 친일파가 아니라는 반론조차 무색할 정도로 친일증거가 너무나 많은 인물입니다. 아니 일제강점기 그녀가 보여줬던 대부분의 행동은 친일 그 자체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함께 진행한 친일단체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김활란입니다. 김활란은 여성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친일 어용단체에는 빠짐없이 발기인,이사,의원 등의 직함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중일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바치는 ‘애국금차회’,조선여성을 계몽하여 황국 여성으로 천황께 충성을 외쳣던 ‘조선임전보국단’,’ 황군과 한몸으로 전쟁을 지원하자고 독려하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등 수없이 많은 단체에서 김활란은 맹활약했습니다.

    김활란은 단순히 친일조직에 명목상 회원으로 등재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총독부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조선 여성들에게 전쟁을 강요하며, 그들에게 희생과 헌신을 외치고 다녔던 명강사(?)였습니다.

    김활란의 적극적인 친일의 백미는 1942년 신시대 잡지에 나옵니다. ‘시국하 반도민중에게 필요한 일체의 국민지식과 훈련과 사상의 보급,전달을 꾀하려고 생긴 획기적인 종합잡지’라는 창간호에 나온 친일잡지에 김활란은 일본인들도 감동하는 글을 올립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허둥지둥 감격에만 빠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지만 어쩔지를 모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갈래를 못 찾는 것도 현명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 반도여성은 그저 내 아들 내 남편 내 집이라는 범위에서 떠나보지를 못했다. 떠나볼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자칫하면 국가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도여성에게 애국적 정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적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戰場)으로 내보내는 內地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막연하게 부러워도 했다. 장하다고 칭찬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그 각오와 준비가 있는 것인가? 실제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나라에 바쳐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대단히 막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각오가 있을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內地 여성에게 배울 점이 많다. 우리 일본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강한 원인의 하나가 일본 여성의 숨은 힘이라 한다. 말없이 참고 나가는 그들의 힘은 강한 인(仁)의 몇 배의 힘을 가진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러 나가는데 조용한 웃음으로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그저 모방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까지 만드는 그 근본정신을 지니도록 해야한다.

    즉 국가를 위해서는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이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내 남편도 내 아들도 물론 국가에 속한 것이다. 최후에 내 생명까지 국가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국가에 속한 내 남편이나 아들 또 내 생명이 국가에서 요구될 때 쓰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못 쓰인다면 오히려 그 얼마 나 부끄러운 일인가. 꼬집어 말하자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바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나라의 것을 나라가 쓰는 것이지 내가 바칠 것은 아무것 도 없는 것이다. 잠깐 맡았던 내 아들이 훌륭히 자라서 나라가 다시 찾아 가는 것이다.

    나는 그 몇 해 동안에 책임을 다한 것이 즐겁고 그동안 그 아들이 많은 즐거움을 준 것이 감사한 것이고 좀더하면 책임을 다 못하여 나라에 돌려보내서 쓰이지 못했을지도 모를 것을 훌륭히 쓰이게 된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것뿐인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신시대, 1942년 12월 김활란 이화여전 교장 )

    김활란은 1942년 12월 신시대 잡지에 태평양전쟁에 미친 일본이 동원한 ‘징병제’를 아주 감격스러운 일이라 찬양하며, 반도 여성(조선여성)에게 내려진 이 보은을 허둥지둥 감격만 하지 말고, 내지여성(일본 여성)처럼 쿨하게 남편과 자식을 전장에 바치라고 충고를 합니다.

    ‘국가를 위해서는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으로 내 남편과 아들은 내 것이 아닌 일본 천황폐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가 과연 박사 학위까지 받은 지식인이라고 그 누가 상상조차 할 수 있겠습니까?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 황송한 일’이라고 주장했던 김활란에게 친일은 부역이 아닌 황국신민으로서의 성은이었습니다. 이런 그녀는 ‘친일파’가 아니라 그냥 ‘친일인’ 입니다.

    ‘친미-친일-친미로 변신했던 김활란’

    김활란의 친일보다 그녀가 한국여성으로 보여줬던 삶을 강조하며 그녀를 옹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친일 속에는 고도의 성공과 출세 전략이 담겨 있었습니다.

    원래 김활란은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교육자인 메리 스크랜턴이 세운 이화학당 출신입니다.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했으며,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그녀는 당연히 친미파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미국 유학을 갔다 오고 나서 친미를 버리고 친일을 합니다.

    그 배경에는 이화여전을 두고 벌인 주도권 싸움 때문입니다. 1939년 이화보육학교(이화여대 부속유치원 전신)의 교장이자 이화여전 부교장으로 있던 김활란은 6대 교장 앨리스 아펜젤러와 이화여전 주도권을 두고 수시로 마찰을 빚었습니다. 그는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하자 슬슬 조선 총독부와 손을 잡습니다.

    ▲이화여전 6대 아펜젤러 교장과 7대 김활란. 출처:이화여대 홈페이지.

    1939년 조선총독부는 외국인 기독교선교사들이 자유주의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이들을 추방하는데, 앨리스 아펜젤러가 추방당하자 그는 곧바로 이화여전 7대 교장이 됩니다.

    중일전쟁 이후 김활란이 조선총독부의 각종 강연회와 행사, 조선인 대표로 끈끈하게 일본인들과 함께 손을 잡은 성과가 드러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흑노(黑奴)해방의 싸움을 성전(聖戰)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고 했다. …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東亞)의 천지로부터 미영(美英)을 격퇴하여 버리자”. (김활란,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 결성식, 강연 중)

    미국과 영국을 격퇴하자고 주장했던 김활란이 해방되자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에 임명됐고, 이승만 정권에서는 ‘한미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친미에서 친일, 다시 친미로 변신하며 살았던 그녀의 인생을 보면서 그녀가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유지하며 살았던 인생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변신의 귀재는 어느 친일파에서나 볼 수 있는 당연한 성공과 출세의 정석이었습니다.

    ‘학생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물’

    김활란을 옹호하는 사람 중에는 그녀가 군정하에서 이화여대 건물을 내놓지 않았던 사실을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건물은 내놓지 않았던 적은 있었지만, 학생들을 일본에 충성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역사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화학당 학생들 모습
    ▲일제강점기 이화학당 학생들 모습.

    1938년 김활란은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유치원)의 400여 학생들을 동원하여 ‘애국자녀단’을 조직합니다. ‘애국자녀단’은 말 그대로 일본과 천황에 충성을 다하고 전쟁을 후원하고 지원하기 위해 어린아이들까지 동원한 친일조직입니다.

    1939년 조선총독부의 명령도 아니었는데 김활란은 먼저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에 앞장섰고, 1941년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개명을 합니다. 교장이 창씨개명을 하니 당연히 학생과 교사들도 앞다퉈 일본이름으로 바꿨습니다.

    아세아 십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써부터 되어 있었습니다. 내지 학도들과 함께 전문학교 법문계 반도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일으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 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당국으로 부터 장차 지시가 있을 줄로 압니다만, 대략 현재의 계획을 말씀드리면 명년 1월 부터 3월까지는 지금 재학생들을 단기간에 훈련시키어 지도원으로서 전 조선에 파견시킬 터이며 다음으로 4월 부터 1년을 수료기간으로 하여 신입생을 받아들일 계획입니다. 앞으로는 결전하의 국가 목적에 단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할 각오가 있을뿐입니다. (매일신보, 1943.12.25)

    1943년 태평양전쟁 막바지 이화여전은 전시비상조치로 폐교당하고 농촌지도원 연성소가 됩니다. 학교가 폐교당하는 상황을 김활란은 오히려 특전이라고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군대에 가는 일이 여성으로 좌절됐지만, 전쟁은 일선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변신하는 것이 ‘황국 여성’으로 다시 없는 특전이라 감격했던 그녀는 신입생을 모집하는데 동분서주하기도 했습니다.

    학교는 교육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그 교육을 하는 기관의 수장이 잘못된 가치관과 출세에 눈이 멀면, 그 학교 학생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나라를 강탈한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은’이라는 교육을 받게 됩니다.

    1944년 이화여전(여자특별연성소)은 150명의 학생을 모집하지만, 40명만 지원하고 그나마 있던 재학생들도 대다수 학교를 떠납니다. 김활란을 따랐던 후배와 학생들조차 그녀가 일제의 광기 어린 전쟁에 적극 동조하자 그녀를 외면합니다.

    친일파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변신을 거듭하며 성공과 출세의 가도를 달렸던 그들이 다시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주장할 애국이 대한민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친일파들을 무조건 숙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들에게 반성과 회개를 할 기회를 주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 후대에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항상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잘한 일이 있기 때문에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만약, 친일을 해도 다른 일을 잘해 모든 것이 용서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일본에 ‘역사 왜곡’과 ‘일제강점기 만행’을 규탄할 수 있겠습니까?

    이화여대 교육이념. 출처:이화여대 홈페이지
    ▲이화여대 교육이념. 출처:이화여대 홈페이지

    ‘잘못된 것은 자정하는 이화인이 됩시다’라는 포스트잇을 여대생들이 위험을 무릎쓰고 3미터 높이 동상에 올라가 붙였습니다. 친일은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화여대 홈페이지에는 일제강점기 친일의 역사는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교가 나라를 잃고 암흑의 시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일은 교육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끄럽지만 그것을 통해 깨달음과 가르침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교육이 아닙니다.

    ‘이대 나온 여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엘리트 여성이라는 자랑스러움과 존경이 담긴 말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저 외모와 학벌을 무기로 성공과 출세를 위해 다른 사람위에 군림하는 여왕벌에 불과합니다.

    학교가 아무리 포스트잇을 철거해도 재학생들이 시작한 김활란 동상 철거 운동을 이제 ‘이대 나온 여자’들이 앞장서서 도와줘야 합니다. 그것은 이대의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지식인들이 감내해야 할 아픔이자 ‘이대 나온 여자’들이 진정한 엘리트 여성으로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의로운 행동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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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eek     #2521

    g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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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서 예배시간에 자꾸만 켕기던 찬송가,
    김활란이는 친일파인데,
    우리 목사 저냥반은 뭘 좀 아시고서 저렇게 구성지게 부르시나,
    결국 멍텅구리 목사로 낙인 찍는데 한 자락 깔았던 그 찬송가,,
    세상에는 아직 정신 제대로 박힌 분들 많이 계십니다. 저는 염치없게도 그냥 퍼오기만,,,
    이글 하반부에 언급되었듯이 한국기독교는 찬송가책에서 제외시킬 수 있었던 몇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실려 있어 불려지는 것을 보면, 오히려 다행입니다. 김활란이라는 친일여성이 만든 찬송가, 김활란 야마기 카쓰란,,, 대대로 기억 잘 해두라고 찬송가공회 으발이들이 은전을 베푸시사…..

    오마이뉴스 원문 기사 – 친일파 노랫말이 실린 부끄러운 찬송가


    ▲친일파 김활란이 지은 찬송가 345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 김동수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중략) 모진 바람/ 또 험한 큰 물결이/ 제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 손 그 노를 저으시니/ 오 잔잔한 바다 잔잔한 바다.”

    찬송가 345장이다. 이 찬송가는 우리나라 여성 박사 1호로 불리는 김활란 박사가 1921년 지은 노랫말이다. 찬송가 아래에는 작사자와 작곡자를 설명한 곳이 있는데 김활란을 이렇게 말한다.

    “김활란(1899~1970)은 인천 태생의 여성 지도자·교육가·이화여전 재학시 그녀는 이화전도단을 구성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 경찰들은 전도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다. 여기에 울분을 느낀 그녀는 조국의 운명을 만경창파의 배 한척으로 비유하는 동시에 나라의 운명을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부탁하는 본 시를 작시하기에 이르렀다.”

    찬송가 노랫말을 지었고, 민족정신을 고취한 김활란! 일본 경찰이 전도활동을 금지할 정도로 조국을 위해 싸웠던 김활란!을 생각하면서 이 찬송을 부르는 기독인들은 가슴이 벅차오를 것이다. 1921년 이 노랫말을 지었을 때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김활란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친일부역자’다.

    김활란은 1937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친일단체인 방송선전협의회·조선부인연구회·애국금차회 따위에 참여하고, 1941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및 참사로 활동하였다. 문인답게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선(內鮮)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1939.3),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1942.12),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를 발표하고, <여성의 무장>(1941.12), <대동아 건설과 우리 준비>(1942.2) 따위 강연을 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중략)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중략) 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중략)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신시대>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일부

    김활란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을 지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친일행적에 문제를 제기하며 교내에 설치된 동상 철거를 요구하고 나선 이유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대생들은 30일 서울 서대문구 교내 본관 앞에 설치된 김활란 총장의 동상에 철거를 요구하는 쪽지(포스트잇)를 붙이는 플래시몹을 했다. 3m 높이의 동상에는 학생들이 붙인 쪽지가 얼굴 부분까지 빼곡하게 찼다.

    학생들은 “당신이 이곳에 있음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김활란동상 철거를 요구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화에 부끄러운 딱 한 가지”, “김활란 내려오고 유관순을 올리자”, “잘못된 것은 자정하는 이화인이 됩시다”는 글귀를 적었다.


    ▲ 친일파 주요한 지은 찬송가 ‘어머니의 넓은 사랑’ ⓒ 김동수

    “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지 나를 감싸줍니다/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 때에 찬송부르십니다.(중략)온유하고 겸손하며 올바르고 굳세게/ 어머니의 뜻 받들어 보람있게 살리다/ 풍파많은 세상에서 선한싸움 싸우다/ 생명시내 흐르는 곳 길이 함께 살리라”(579장)

    시 <불놀이>와 <빗소리>로 잘 알려진 주요한이 지은 찬송가 579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은 5월 어버이주일이 되면 자주 부른다. 우리교회 역시 부른다. 하지만 주요한 역시 김활란처럼 친일부역자다.

    “오늘에서랴 우리를 / 부르시는 높으신 뜻을 / 서로 전하여 말하며 / 눈물 흘리는 것을”

    1944년 4월 지은 ‘손에 손을’이다. 징병제를 찬양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조국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다. 징병으로 끌려가 죽은 이인석을 위해 지은 ‘첫피’는 핏속에 친일이 흘러넘침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피는 뿜어서 누런 흙 우에 검게 엉기인다/ 형아 아우야 이 피는 너들의 피다/ 2천 3백만 너들의 피가 내 몸을 통해서 흐르는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 피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는 말은 우리 역사 자체를 부정한다. 주요한 의식 속에는 고조선-삼국-고려-조선이 없다. 오직 일본제국주의만 자신의 역사인 셈이다. 친일도 완벽한 친일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노랫말이 찬송가에 실려 지금도 한국교회가 부르고 있다. 찬송가에서는 주요한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요한(1900~1979)은 시인이며 언론인·정치인, 젊었을 때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으며 후에는 시인으로 문예 동인지 <창조>에 ‘불놀이’란 시를 발표하였다. 본 찬송시는 1967년 한국찬송가위원회로부터 어머니날 찬송가를 의뢰받고 특별히 쓴 것으로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

    참 흥미로운 설명이다. ‘젊었을 때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뼛속까지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감췄다. 친일행적 부끄러움을 안다면 이제 김활란과 주요한이 지은 두 노래는 찬송가에서 빼야 한다. 사실 기회가 있었다. 지난 2006년 ‘새찬송가’가 나왔다. 1981년 통일찬송가 이후 35년만이었다. 1981년에는 김활란과 주요한의 친일행적이 도마위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갔지만, 2006년 새찬송가를 만들 때는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언제쯤 찬송가가 새로 편집될지 모른다. 만약 찬송가가 새롭게 편집되면 반드시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때’와 ‘어머니의 넓은 사랑’은 빼야 한다.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했던, 죽음을 노래했던 친일부역자들이 지은 노래를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민족정신을 짓밟은 행위다. 지금까지 우리교회도 이들이 지은 찬송가를 불렀다. 이제부터 더 이상 부르지 않겠다. 신자들에게도 김활란과 주요한은 친일부역자임을 가르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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