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그날이 오면,, 가정교육

바보스쿨 구역예배 2013년 첫번째 말씀 나누기는 역할을 뒤바꾸겠습니다. 설교자는 평신도인 제가 하고요, 듣는 이는 평신도인 여러분이 아니라 목사들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내용은 사실 평신도가 듣기에는 약간의 지루함 딱딱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사들에게는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여태껏 “간추린 로마사” 한권 제대로 독파해보지 못한, 그리고 그런게 있었는지 조차도 모르는 자칭 목사들에게는 자존심좀 상하시라고 드리는 글입니다.

한편, 평신도인 우리는 목사의 입장에서 들어 보시면, 약간의 지루함을 달랠 수 있을 같기도……

오늘 목사들을 빙둘려 앉혀놓고 평신도가 설교하는 바보스쿨 구역예배, 딱딱한 역사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나눌 본문 말씀은 이글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예고해 드린 바, “가족”이 그 주제입니다. 아니지요 사실상 일종의 글 재료로서 “가정” 혹은 “가족”이 맞는 말입니다.

우리 평신도는 너무도 많은 경험을 하셨지요, 담임 목사가 설파하는 설교시간에 가족사랑 아름다운 가정지키기 등등을 통해 때로는 자식들을, 때로는 어버이를, 남편을, 아내를 향한 충정어린 부탁 내지는 훈계, 그것도 성경이라는 회초리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과연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의 가족(family) 혹은 가정이란 성서기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성경은 그리스 로마가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기록되었기에, 당시의 그러니까 로마시민들에게 있어서 가족의 의미를 알아야한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죄성합니다. 또 판단했습니다. 판단하면 안되는데. 주께서 하실 일을 제가 감히 “판단”혀서요. 그런데 드는 마음 어쩌겠는가요.

그래서 초기시대의 로마역사책 영문판을 읽었습니다.

로마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사람 각 개인이라는 개체와 그가 속한 사회의 속성과 그 둘의 기능을 담아 내는 종교적 윤리적 틀을 이해함이 로마 역사 이해의 필수요건이다 라고 다행히도 그 책의 서두에는 쓰여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기능(function)하고 있던 대 원칙은 계층 혹은 위계질서(hierarchy), 즉 사람이나 어떤 객체에 대해 지위고하, 권력의 적고 많음 그리고 특권에 대해 순위를 매겼습니다. 누가 봐도 불평등 그 자체이지요. 불평등(inequality)이란 로마인이 받아 들인 삶의 조건이었습니다.

낮은 순위의 사람은 높은 순위의 사람에게 복종,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는 낮은 순위의 사람에게 혜택을 줄 의무를 지우는 것이 아마 이상적인 모양새였습니다.

로마의 정치와 사회의 계층체제(hierarchical system)의 핵심에는, 바로 가족시스템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초기 로마시대의 통치기구(나라, state)란 그 기초가 바로 가족이고, 나라를 구성하는 모든 가족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단순한 공동체(community)였습니다.

개개의 가족에서는, 가장인 부(父)가 자신의 자녀와 남자인 자녀들에 대해, 자신이 죽거나 더 이상 슬하에 두지 않겠다고 선택하기까지 자녀들을 제어할 수 있었는데 이를 가부장제(paterfamilias)라고 말합니다. pater라는 말은 father이고 mater는 mother입니다. 엄마가 장악한 가족은 materfamilias가 되겠네요.

다수의 여러 가족은 서로 관심사에 따라 그룹(group)을 이루었고 그러한 그룹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그룹, 집단이 바로 나라 (state)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즉, res publica 문자 그대로 공동의 선(common wealth) 여기서 바로 코뮤니티(the community)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이번에는 국가 country에 대한 라틴어 명사 patria에 대해 살펴보십시다. 그 말의 형용사가 patrius인데, “가장(the father)에게 속해 있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father 라는 말의 개념이 이제 집안을 벗어나서 내가 속해있는 지역사회 공동체로 뻗어 나갑니다. 결국 로마의 종교활동 그리고 윤리실천요강이란 것들은 기본적으로, 각 개인이 속한 가족의 가장들의 모임인 지역사회 공동체에서의 또다른 가장역할을 하는 사람들 혹은 복수의 가족이 제어하는 코뮤니티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 한마디로,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도 단 하나의 가족과 그 안에서의 질서로 부터 확장되었다 이 뜻이네요.

로마를 지배하려던 야심찬 황제들, 그들이 속했던 가족(family)은 로마가 끝날때까지 지속된 가장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가족은 살아있는 객체였지만, 국가(state, 나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국가로부터 혜택은 시민에게 동기부여가 되지만, 국가의 명예를 위해서는 그만큼은 못되었지요. 국가의 이익, 개인 혹은 가족의 이익은 서로 잘 융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국가는 잘나가는 이해관계가 얽힌 가족들의 “누가 먼저 차지하나” 식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국가의 기본 요소가 되는 가족이란 뜻의 family는 영어에서는 로마의 그것 보다 대단히 넓은 개념의 어휘입니다. family 이 말은 직계 방계 등등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라틴어에서는 좀 더 세밀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3가지, agnate 아버지 쪽 사람들, cognate 어머니 쪽 사람들 그리고 affine 입니다. affine 은 예를 들어 영어에서 in-law라는 접미사가 붙는 예를 들어 father-in-law 장인, sister-in-law 처제, stepbrother 의붓형제 등등을 아우릅니다.

여기서 agnate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말로 직계존속 쯤 되나요. 이들이 paterfamily 즉 부계가족의 정점에 있습니다. 한 가족의 의사결정은 바로 이들로 부터 나옵니다. 또한 피상속자였습니다. 상속자가 유서없이 죽는 경우, 미성년 아동의 보호자가 됩니다. 그리고 여자와 어린이는 가족의 위계상 권위의 성인 남성에게 종속 되어있었습니다. 심지어 간음한 배우자의 생사여탈권까지도 합법이었지요.

권위적인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로마의 가족 혹은 가족제도,,, 뭐좀 집히지는게 있으신가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 제도아래의 가족에서의 각 구성원은, 의무에 대한 자발성과 권위에 대한 순종심으로 양육되고 맙니다. 이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순종,,,,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 그리고 들어야만 하는 말인가요.

민간인들 사이의 관계, 왕 그리고 관청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부계가족 위계질서의 확대판입니다. 앞에서 이미 사람들 사이에도 등급이 매겨져 있듯이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족이 다른 가족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 있으며 댓가로 수혜를 베푸는 상하관계가 잘 정립되어 있었고 그것은 로마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시스템이었습니다.

이쯤이면 오늘 본문말씀을 읽을 때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글이 길어짐으로 가족과 종교, 가족과 노예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33절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에베소서 6장 1-9절

1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이처럼 로마의 가족을 지배하던 질서 이름하여 House Code의 가장 큰 그림이 에베소서에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에베소서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베드로서에도 등장합니다.

그러면 에베소서는 언제쯤 쓰여졌는지 알아 보십시다. 빨라야 주후 85년에서 95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학자들은 말합니다. 주후 67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박살납니다. 이때가 바로 제1차 유대인 항쟁이 일어 났던 때이지요. 그리고 유대땅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전쟁에서의 패배라,, 그것은 곧 노예 – 즉 나의 나됨 즉 주체성의 삭탈을 의미하는 것임을, 일제 36년 한경직 신사참배를 통해 뼈가 저리도록 이미 배웠지요.

이러한 시대, 사회적, 정치적상황 아래에서, 로마신화가 일상 생활인 로마인들을 향해 예수가 주님(The Lord)이다, 세상의 평화는 (황제가 아니라) 주님으로 부터 나온다 는 등등의 표현이 들어간 책을, 아니죠 서신이니까 책이 아니라, 편지를 여러분이 돈들여 발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1900여년전에는 그 보잘것 없는 마분지도 없었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파피러스 – 엄청 비쌌답니다.

비록 자신들이 떠 받드는 시중에 갓 등장한 brand new 종교인 기독교, 로마 관청과 시민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미신으로 폄하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나의 나됨”을 확인 하는 어떤 순서에 입각한 예식 절차의 한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그 편지가 큰 소리로 읽혀진다고 생각해보십시요.

자신있게 발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책이 세상에 나오자 마자 로마관청의 불쏘시개가 되는 것은 아닐까 ??

아니, 이 문건으로 인해 국가보안법이라는 귀걸이에 걸려드는 것은 아닐까 ??

아니, 이 문건으로 인해 종북좌파라는 코걸이에 걸려드는 것은 아닐까 ??

따라서 이러한 House Code를 집어 넣음으로, 이 책은 우리 로마인들의 “바람직한 가족지키기”에 부응하는 책이다, 너무 anti-Rome이 아니니라,, 비빌 언덕이랄까요,,,

글을 쓰는 자신은 하고싶은 말이 있다는 분명한 목적이있지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일부러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한군데서가 아니라 세군데에서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필자의 눈에는 가족교육에도 목적이 있겠지만, 로마관청을 향한 성서기자의 자기검열이 찐하게 다가옵니다.

만일 필자가 성경을 쓴다고 상상해보면, 모세5경이 당연히 책의 서두에 들어올테고 거기에는이미 십계명, 즉

부모를 공경해라, 간음하지 마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마라 이정도면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인 가정교육이 들어 있는데도 굳이 여기서 그말을 해야할까 ??? 한번쯤은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쓰는 저자는, 지금의 성경66권에 이 책(에베소서)이 포함될 것이며 모세5경도 물론 포함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무엇때문에 구약에 들어 있는 십계명에 이미 나와있는 내용을 여기서 그대로 다시 반복할까요??

바울 당시 일단의 사람들은 유대교로부터 갈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성당사람들이지요, 이 사람들이 유대교의 경전 토라를 자신들의 경전으로 삼았을까요 ??

오늘 이야기가 길어짐으로, 로마사회의 house code와 종교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늘 바보스쿨 구역예배에 청중으로 참석하신 목사님들께 과제로 드리겠습니다.

요점만 말씀드리면, 오늘날 교회에서 발간되는 인쇄물에 xxx목사님, yyy장로님 등등 뒤에다가 님자를 붙여 극존칭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지요. 다시 말해, 할아버지 앞에서 손자인 내가, 내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의 자식인 아버지를 가리켜 “아버님” 이라고 부르는 것과 똑 같지요. 철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이지요.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장유유서의 유교사상이 비틀려 교회당안으로 들어온 경우입니다.

로마사회의 근저를 이루던 가족의 위계질서(hierarchial system), 카톨릭이 성립되면서 자리잡은 성당 내의 질서,,, 많이 흡사하지 않습니까 ?

한국의 기독교가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글쎄요,, 말잘듣는 성도를 길러내기 위함은 아니었던가요??

교회안에서의 가정교육이 좋다 나쁘다 그르다 당연하다, 이 것을 떠나서 다른 각도에서 한번쯤 고민해보셨나요 ? 고명하신 목사님들아. 사도행전에 보면, 분배가 공평치 않다고 말하니까, 그러면 사제인 우리는 말씀가르치는 일에만 열심을 낼터이니 집사(deacon)를 세워 내부 잡일을 맡기자 이런 식으로 쓰여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 구역장 권찰 집사 안수집사 장로 은퇴장로 이러한 단계를 거쳐 – 그 로마사회의 근본인 가정 질서를 그대로 접목하여- 그리하여 성숙한 교인에 이르게 되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적도 없거니와 과연 이러한 현상이 예수가 원한 그림이었을까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국 66권의 성경에 갇혀있습니다. 그 숫자 66은 성서기자들하고 별 상관없는 숫자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책이 66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몸부림 친 흔적도 없습니다. 어느 날 일어난, 갑작스런 황제의 하사품이었습니다.

기 도
예수께서는 허물 많은 우리를 향하여 벗이라고 여기셨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환난 가운데 있을 때 그 짐을 같이 지고 가신다고 들어왔습니다.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말하지 않고서는 배겨 낼 재간이 없는 내 안의 추악함을 예수 앞에서 다 내려놓을 수 있다고 나는 믿어왔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자 벗인 예수, 그러나 교회에 가기만 하면 당신은 내게서 멀어집니다. 나와 내 형제들은 당신을 절대화하기에 여념이 없어 결국 우리로 부터 당신을 격리켰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당신은 십자가에 꼭 그자리에 매달려 계십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군가로 부터 당신을 그렇게 소외시키도록 언어훈련을 당해왔습니다. 학교에서 그랬습니다. 교회에서 더 그랬습니다. 내가 당신을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당신은 어쩐지 서먹서먹해짐니다. 예수 – 아 이렇게 아름다은 이름이랴. 이리도 다정스러운 이름이랴. 오늘 나눈 말씀, 로마사회의 제도가, 질서가 교회로 그대로 흘러 들어와 생겨난 불필요한 조직, 계급장이 당신이 의당 누려야 할 영광을 가리고 있음을 배웁니다. 1900여년전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기록했던 성서기자의 자기검열의 쓰라린 마음을, 오늘 벗들과 함께 느껴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왜 그런 이야기가 세번씩이나 쓰여쪘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지혜없음을 긍휼히여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연 보

사람 살리는 병원, 고아원, 의학연구소등을 향하여 각자 알아서.

“5월 그날이 오면,, 가정교육”에 대한 한개의 댓글

  1. 구역예배 오래 기다리렸습니다. 4월 말에 올릴까 하다가,,, 일단 출석하시는 교회 목사에게 설교 들으신 다음에 올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셍각에 저 역시 기다렸습니다.
    또한 로마사를 공부하면서 써놓았는데요,,, 너무 길었습니다. 많이 자르고 자른 것입니다. 많이 부족하더라도 너그러이 읽어주시고 함께 고민해 보시십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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