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빛교회-임현수목사-설교비평-예수님 따라가기-용서와 사랑의 본

이번 설교비평 대상은 큰빛교회 임현수목사(이하 임목사)가 3월 7일에 행한 “예수님 따라가기 – 용서와 사랑의 본”이라는 제목의 주일 낮 예배 설교를 대상으로 한다. 동영상을 띄우고 한번 들어본 소감은, 한마디로 초짜배기 정신과의사가 이제 막 개업한 클리닉에 다녀온 소감이랄까. 용서라,, 기독교의 본질이 용서라고 설파하는 임목사, 여전히 그는 자기의 세계관에서 단 한발짝도 나서지 못함에 안타까울 뿐이다.

임목사는 본문 말씀으로 누가복음 23:34~43에 쓰여 있는 예수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수시간전의 이야기를 뽑았다. 필자는 수시간이라 말한다.

로마제국에서 십자가 사형을 집행함에 있어서는 두가지 방법이 있었다 전해진다.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하루 혹은 그 이상)에 걸쳐 고통을 더 오랫동안 느끼게 하면서 죽어가게 하는 완만한 방법과 빠른 시간안에 죽여버리는 방법,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손 혹은 손바닥 못을 박는다거나 하는 아뭏든 필자는 이 대목에 이르면 그 잔혹한 십자가형을 몸소 받았을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모습이 눈물짓게 만드는 구절인 것이다.

유대인의 관습을 준수하려 했던 빌라도, 예수가 죽은 다음날은 유대인 안식일, 전통상 시체를 매달아 두거나 누구를 죽이거나 하는 일은 율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fast track을 선택하여, elegance한 안식일을 맞으려 했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가슴을 찢어 내 버리릴 듯한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간직한 누가의 진술에서 꺼낸 것이 “용서”라는 오늘 임목사의 화두이다.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임목사는, 손기철 장로 초청 치유 집회 때 땅바닥에 딩구는 사람, 몸부림치며 절규하는 사람, 실신한 사람, 울부짖는 사람들을 본 느낌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임목사는, 용서는 어렵다, 용서할 마음이 드는 순간 성령님이 임재하신다는 증거이다, 등등의 말을 하면서 “용서”에 대해 부연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가 임목사 자신의 이야기이지 그것이 결코 성서 텍스트에 천착하여 도출해낸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다.

들어 보시라, 성경해석이 어디에 있는가? 거의 전부가 자신의 이야기 혹은 성인군자, 영화 이야기 혹은 자기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필자는, 임목사가 이런 식으로 성경말씀의 권위를 심리치료사의 처방전쯤으로 격하시키는 것에 대해 연민한다.

임목사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면, 그것만 계속하면 된다. 왜, 성경말씀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중간 중간에 끼어들어, 약방의 감초가 되어야하는가? 약방의 감초는 글자 글대로 감초이다. 몸을 치료하는 주된 약재가 아니다.

임목사에게 “감초가 아니라 주된 약재”에 관한 이야기를 필자는 듣고 싶다.

또한, 임목사의 설교 패턴은 지난번 처럼, 나열식 설교 방법이다. 예를 들어,

1. 주제1
2. 주제2
3. 주제3
4. …..

그리고 각 주제 밑에 소주제를 두고, 각각의 주제는 오늘의 설교제목에 포커스된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설교에는 크게 보아 두가지 패턴이 있는데, 임목사의 이번 그리고 지난번 설교와 같은 나열식 설교가 그 중 대표적인 것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나열식 설교는, 메세지는 명료하게 들어나게 할수는 있을지언정 청중인 필자는 자꾸 설교의 맥이 끈김을 느낀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일 수가 있다. 필자에게는 그렇다. 왜냐하면, 설교의 시작부터 처음까지 물흐르 듯이 하나님의 세계로 빠져들어 성경속의 인물들과 저작자 자신과 그리고 나, 이렇게 서로 다른 시공간의 객체가 한덩어리가 되게끔하는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는 이공계 기술서적에서나 봄직한 나열식 설교보다는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허구헌날 고민하는 에세이와 같은 형식이 청중과의 교감에 더 좋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설교를 잘하시는 명망가들은 이러한 에세이식을 선호한다.

필자가 오직 두편만의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임목사의 설교 패턴은 대부분 “이공계 기술서적 저자들이 선호하는 나열식 설교”이다라고 판단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다.

줄여 말하면, 35분 내지 40분간 청중에게 읽어 줄수있는 한편의 “소설”을 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중요한 것은 성서텍스트의 해석과 하나님이 그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면, 그것이 바로 소설을 넘어서는 “설교”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임목사의 설교는 나열식 설교이면서, 너무나 많은 곳에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말함으로 또한번의 “교훈”을 청중들에게 강요한다.

오늘 임목사가 주일 낮 대예배의 설교시간에 행한 “교훈” – 필자는 설교가 아니라고 표현한다 – 은 용서이다. 다음의 main topic 다섯 가지를 보면, 어떠한 방법으로 용서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각론에 들어가 보아도 역시 하나님 말씀은 임목사의 설교에 있어서 훈장님이 학동들을 향해 책상머리에 얹어 놓은 회초리 수준에 머물러 있음이, 필자는 안타까울 뿐이다. 저런 설교를 듣고자, 매주 기천명이 운집한다? 신비롭다.

1. 인간의 무지를 이해할 때 용서가 가능합니다.
2. 용서의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3. 용서의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4. 용서는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5. 용서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서부장로교회 박헌승 목사는 설교중에, 신파조에 가깝게 그리고 대단히 느끼하게 다음처럼 한 구절 읊은 적이 있었다.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필자를 비롯한 모든이들이 그렇게 말한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기독교도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예배시간 즉 “주일 대예배”의 횟 수가 내게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는 세월에 덧없이 묻혀져 가는 내 삶의 중요한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 – 예배 – 가 어떤 별로 공부 안 하는 목사의 뇌세포에 각인된 이야기로만 채워진다면, 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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