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빛교회-임현수목사-설교비평-강해설교인가 가정교육인가

오늘은 토론토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이하 임목사)의 “여호수아 강해 여호수아의 고별설교”란 제목의 설교를 독후감 대상으로 삼았다. 먼저 설교 게시판을 훑어보고 “강해설교”라는 말이 제목에 있는 것이 눈에 띄어, 약간 더 눈길이 갔다.

강해라 함은 성경을, 그러니까 구약성경의 여호수아서 24장전체를 혹은 일부를 강의를 하듯이 풀어서 논한다는 뜻이므로, 오늘의 설교는 강의하듯이 풀어서 논하는 쪽에 가까운 설교가 될거라고 기대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동영상을 띄워 일단 한번 끝까지 들어 보았다.

약 20여분만에 본문강해는 사실상 끝나고 임목사는 결론 즉 메세지가 무엇이냐, 이것이 중요하다며 청중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지만, 결국은 임목사도 별수 없이 가정교육으로 이 설교를 마무리한다.

시간에 따른 이야기구성을 살펴보면, 설교 시간이 40여분 약긴 남짓인데, 그 중 절반은 임목사 생각에는 강해일지 모르겠으나 강해로 20여분, 나머지는 메세지인데 그것의 결론은 가정교육이라고 나머지 절반 20여분을 소비했다.

먼저, 나는 이것이 강해도 아니고 설교도 아닌, 임목사께서 좋아하시는 여호수아 고별설교를 한번 읽고, 잘 모르는 단어 설명과 요점정리 수준이라 것이 첫인상이다.

여호수아서 24장을 강해하였으니 그 앞의 것들은 어떻게 강해설교했나 알고 싶어 게시판을 찾아봤으나 – 필자는 게시판 제목만을 확인했으므로 실제로 다른 제목의 여호수아강해 설교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 필자의 나태함을 용서해주십사하는 부탁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직접 교재를 펴보라고 한 걸로 봐서 교인들에게는 이미 앞의 장들에 대해서는 강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40년 대장정을 끝내고, 이제 젖과 꿀이흐르는 땅을 접수한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별설교, 어떻게 보면 모세의 잔재가 이제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퇴장하는 것 처럼 보이는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장이다 라는 것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모세 6경이라하여 그 마지막 책으로 여호수아서를 포함시키는 것도 보았다. 사실, 이 책을 필자는 수년전에 두어번 읽어 본 것이 전부이고, 이 글을 쓰기 위해 22장부터 다시한번 숙독했다.

신학적인 것은 원래가 필자가 말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 그렇다고 하여 문자적 의미까지도 모르쇠로서 일관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한마디 한다면, 여호수아서는 전쟁이야기이다. 그것도 피가 철철 넘치는 잔혹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넘어가는 해를 세워놓고 전멸(박멸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시키니까 하나님이 내말 잘들었다 칭찬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어렸을 적에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감동했던 마음이 훗날 무협지를 읽으면서 그랬던 것과 비슷했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세가 한번 성질내는 내는 바람에 가나안에 못들어 가고 여호수아가 대신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 이르러서는 출애굽에 관한 한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가나안의 경제, 사회, 종교 시스템을 완전히 접수한 것으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 임목사의 24장의 읽고 풀이함을 잘 들어보면, 여호수아가 자기 사후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이미 끝난, 하나님의 구속의 장대한 계획의 시발점으로 출애굽을 강행하셨고, 탈은 있었으나 일단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어서 출애굽사건의 끝이라고 알고 있는데, 정작 가난안 정복의 당사자인 여호수아는 뭔가 아직 뒤가 켕기는 듯한 말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임목사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으로서 하신 일과 그에 대한 인간의 삶의 자세를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섬기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출애굽을 강행하셨다고 성경구절을 들어 임목사는 말한다.

그런데,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떻게 섬기는 가에 대해서는 임목사 언급이 없다. 물론, 사랑으로 섬겨야한다라고 임목사의 짧은 언급은 있었다. 물론 앞서 있었던 모세 5경에 계속되는 이야기이므로 앞서의 책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제사를 하는가가 전제되었다는 것을 필자는 추측한다. 비둘기 잡고 소잡고 태우고 돼지고기 피하고 이런 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려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과연 임목사를 포함한 우리가 이런 삶을 살 수 있는지 묻고 싶다.

패배의식에서 “나는 안되” 이런 심정에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하나님도 잘 아시고 예수께서도 그것을 이미 간파하셨다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류 역사상 그런 일을 한 이는 오로지 예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 필자가 알고 있는 지식이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또 내가 잘 못 되었구나”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서 임목사께서는 “사랑”을 들고 나온 것으로 보였다.

오늘 본문에는 사랑이라는 말은 없다. 피로 얼룩진 전쟁의 이야기에서 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약한 경우일 것이다.

약 21분여가 지나는 중반까지, 강해라기 보다는 본문에 필요한 다른 성경구절을 끌어다 맞추는식의 이야기 진행이었다. 그리고 끌어온 성경구절들은 이미 익히 들어 이해하고 있는 의미이상은 아니었다.

이런식으로, 이미 알고있는 성경구절을 자꾸 되뇌여 말하는 것은 세뇌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이런 의도이리라. “성도님들도 다 아시지요 성경 몇장 몇절 말씀” 이렇게 말하여 자꾸 이야기의 촛점을 청중들의 사고방식 태도등으로, 즉 보잘 것없는 인간의 이야기로 돌리곤 하여 설교의 본질인 하나님이야기를 흐리게 만듦으로서, 설교의 주제가 되어야할 하나님은 목사가 휘두르는 회초리 수준으로 격하되어 버린다.

임목사가 그 교회에 오랜기간 시무했으니까, 그런 성도들의 신앙태도라는 것들도 결국은 자기의 신앙지도방법 내지는 설교내용에 문제때문일 가능성도 아주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기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는데도,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전적으로 성도의 결정이 늦다, 성도가 이랬다, 화살이 성도들에게만 향한다. 그들을 힐난하고 잘 못을 지적해서 어차피 안 된다는 패배의식을 심기보다는, 보듬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이제 설교 결론에 이르른 듯이 결론을 예시할 때에 – 나는 여기서 약간 흠칫했다. 동영상이 아직은 반은 남았는데 벌써 결론인가 해서이다 – 선택이라는 말과 동시에, 그에 관련된 성경 인물을 등장시킨다.

다윗, 전도서 잠언을 쓴 솔로몬등을 말할 때는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끌어들여 청중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에는 꼼짝 달싹도 못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5절에서 여호수아가 촉구했던 결단을 말하면서, 우리의 “선택”으로 화제를 돌려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청중들을 임목사는 은근히 압박한다.

“말로는 선교 다 가겠다, 그런데 실행은 없다, 선교하는 교회는 많은데 실제교하는 교회 10%도 안 된다, 김모 목사는 선교때문에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왔다, 실행 안해서 그렇다,”

26분쯤 지나서, 2세들을 봐도 그렇다며 화제를 옮긴다,

“우리의 자녀가 언제까지, 미국 캐나다의 애들처럼 그냥 놔둘거냐, 미국 캐나다 조상들이 얼마나 하나님 잘섬겼냐,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 다 떠나고 세대로 계승이 되지않는다, 여호수아의 말 오늘 지금 당장 결단해라.”

“마틴 루터가 말하기를 사탄의 전략은 ‘차차하지’이다, 전도할 때 가장 힘든사람이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결단을 바로 못해서 다 망한다, 기회는 우물쭈물하다가 놓친다. 엘리야가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질타하는 광경을 봐라, 빨리 선택하는 결단을 보여라, 우물쭈물하는사람은 결단을 못한다, 하나님이 감동을 주실 때 작정을 해라, 서원을 해라, 기회가 있을 때 해라, 말씀하실 때가 있다, 은혜 주실 때가 있다, 감동을 주실 때 해라, 오늘 당장 해라, 지금까지 못했지 않느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집과 고향을 버렸다. 모세는 궁전의 편안함 권력 다 버렷다, 다윗 요시아 히스기야 기드온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우상을 바로 다 부수었다, 그렇게 하면 명예, 재물, 건강, 생명도 주시며, 천사가 보호하고, 하나님께서 항상 사랑을 입혀 주신다, 범사를 형통할 것이다, 자손이 복받는다, 기업이 번창한다 기도는 다 응답받는다, 신유의 은총도 허락한다, 마음의 평강도 있다, 계22:5에서 처럼 영생의 안식의 복을 주겠다……”

내가 보기에 이 정도면 설교가 정상궤도로 부터 이탈했다고 본다.

필자가 복음서로 부터 읽은 예수는, 나를 따르는 길은 좁고 협착하다고 말한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로 와서 어떻게 하면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생을 얻겠습니까 물었더니, 예수는 딱한마디만 했다. “너 가진것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 주고 와라” 그랬더니, 그 청년이 고개만 긁적이고 돌아서 갔다는 이야기 – 필자는 물론 임목사는 더 잘 알텐데.

임목사는 자기 자신이 한말을 한 시간도 못되어서 잊었다는 말인가, “네가 나를 믿으면 너를 보호하겠다” 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임목사 자신이 24장 25절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언약이 약속아닌가, 약속은 뭐고 언약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복은, 명예, 재물, 건강, 생명, 자식 잘되는 것, business잘 되는 것, 기도 다 응답 받는것 이런 허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보호하겠다”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 무슨 재물 건강 기도응답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가? 이것은 이름하여 기복신앙의 강요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2300만달러짜리 교회당에서 나오는 설교치고는 글쎄올시다.

임목사의 결론 부분은 계속된다.

“하나님에 대한 공부를 하자, 섬김의 의미를 바로 알고, 예수가 누구신가 바로 안다면 우리가 할것은 섬김밖에 없다, 섬김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보상 크다, 이것을 다 축소해서 말하면 여호수아의 고백은 가정을 지키라는 한마디이다. 가정을 지키는 것은 가족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며 가정을 지키는 방법은 성경적으로 가정을 세우는 것이다. 자녀를 지키기 위해 기도해라, 자식을 위해 기도해라. 유대인의 목숨건 신앙교육 가정교육, 가정교육이 먼저이다. 현대는 가정이 기능을 못한다, 여성이 사회진출한 후 부터, 이혼율 3위 국가가 되었고, 청소년 범죄가 증가했다. 경제만 추구하니까 IMF, Sub Prime 사태가 왔다 이것은 하나님이 깨우는 것이다, 가정을 키우는것이 가장 우선이다, 유대인 가정을 봐라, 유대인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외우게 만든다, 철저한 가정교육 목숨건 신앙교육…… 우리교회 가정교회가 모이면 위대한 힘을 쓸 것이다……”

임목사는, 이렇게 강해도 마쳤고 설교도 마쳣다. “As for me and my house, I will serve the Lord” 나와 내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 이 성경구절에서 “가정”이라는 단어를 끌어 내어 가정이야기로 자신의 가정관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낸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신뢰가 안간다. 내 이웃이 사기를 크게 쳐서 혹은 강도짓을 하여 돈을 많이 갖게 되었고 그 돈으로 잘 경영하여 그 집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는 대단한 존경을 받는 경우, 내가 내자식에게 “이웃집 봐라, 얼마나 근사하냐” 이렇게 말하여 내자식으로 하여금 부도덕한 이웃을 존경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내 자식이 삶의 지표로 삼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고 임목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곳 CBC뉴스를 보면, 간혹 이곳 원주민 이야기가 나온다. 이미 아메리카 대륙을 백인 청교도들이 어떻게 유린했는가는 식상할 정도로 알려져있다. 하나님 그렇게 잘 섬겼던 청교도들이 이땅에서 저지른 무차별 살육에의한 거의 멸절에 가까운 만행을 저질러 빼앗은 땅에서 얻은 부유함의 원인이, 하나님을 잘섬겨서 그렇다 라는 일반 한국 서울 교문리 근방의 광신도들의 관념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일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수 많은 생명을 무참히 살육하여 얻은 번성을 하나님 잘 섬겨서 그렇다는 임목사의 역사 인식은 실망스럽다.

그렇지만 토론토 아니 캐나다에서 잘 나간다는 교회 담임목사의 역사인식 수준이 그 것 밖에는 안된다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교회 앞 마당에 주차된 Cherokee라는 브랜드의 차가 있을 것이다. 그 차이름,Cherokee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인가.

참고로, 2008년 하퍼 총리가 원주민들에게 백인 교회가 원주민 아동들을 격리하여 그들의 언어, 문화를 단절시키려한 것에 대해 사죄하는 연설기사가 2008 6월 11자 National Post에 실려있다. 이 기사에는 큰빛교회가 속한 칼빈의 장로교단(Presbyterian)이 포함되어 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그리고 가정교육을 강조했다. 백번을 강조한들 지나치리요. 그런데, 내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은 꼭 임목사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는 아니므로 오해없으시기를.

옛날 부흥회에 가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부흥강사라는 사람들이 헌금 울궈낼 목적으로, 축복, 건강, 재물이니 이런 것까지는 애교로 봐주겠는데, 꼭 이런 말을 한다.

“십입조 떼먹으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시는데, 대체로 자식을 치더라”

이 한마디에 우리의 아낙네들이 겁을 먹고 없는 돈 빚내다가 바치지 않았던가. 이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려 목적을 달성하려 한 경우이다.

그런데, 요즈음 목사들은 거기까지는 안가는데 자꾸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목사들이 강조한다. 우리 집 사정을 걱정해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니 거기까지도 좋다.

그런데 걱정이 지나쳐서 꼭 애들 이야기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목사들도 있다.

목사들이 새벽에 일어나 밤중까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큰빛교회처럼 큰 교회는 담임목사 혼자 절대로 못할 것이다. 만일 500 가정이면 가구당 2자녀라고 계산해서 1000명에 대해 기도해야하고 일주에 6일이면 하루에 150명분 기도를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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