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어렴풋이,,, 야고보

2014년 오늘 바보스쿨 구역예배는 불과 며칠전에 세계적인 통신사인 UPI가 송고한 참으로 안타까운 기사로 시작합니다.

필라델피아 2월 20일 UPI 통신 —
허버트와 캐터린 부부는 감옥행에 직면했다. 두자녀가 폐렴으로 죽어감에도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홉명의 자녀중 두명이 폐질환 가운데 성장하며 죽어 갈 때, 기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재판관 벤자민 러너씨는,

“나에게는 하나님과 직통하는 그 어떤 통로도 없다. 그러나, 당신들의 아들을 데려가기로 결정한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임을 나는 확신한다 (I do know)” – 하략

Herbert and Catherine Schaible will face prison for refusing to seek medical treatment as two of their children were dying of pneumonia. The Rhawnhurst, Pa., couple were sentenced to 3 1/2 to seven years in prison each for doing nothing but pray as two of their nine children grew sick and died from the treatable lung infection.

“I don’t have any pipeline to Heaven,” said Common Pleas Court Judge Benjamin Lerner in court Wednesday, “but I do know that it wasn’t God who decided to take [your son]. It was you two who took him.”

UPI 통신 기사 – 출처: excerpted from http://www.upi.com/blog/2014/02/20/2nd-prayer-death-leads-to-prison-sentences-for-parents/5351392909069/#ixzz2u5GHUvhq

더더욱 가슴 아픈 일은, 이번이 두번째랍니다. 이미 그들은 또 다른 자녀를 수년전에 그런 식으로 죽게 만들었답니다. 의사로 짐작되는 어떤 이는 “타이레놀만 먹였더라도……” 이렇게 한탄하는 댓글도 보입디다.

오늘 말씀 묵상으로 정한 말씀은 야고보서 2장 14절 이하 2장 끝절까지입니다.

야고보서 2장 14-26절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6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본문 말씀대로라면, 바울의 신학은 반쪽 신학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바울신학의 전매특허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합죠. 이런 한자어는 성경에 없습니다, 일부 잘난척하기 좋아하는 목사/신학자들이 왜넘덜이 선호하는 한자표현 방법을 도용하여 새로운 용어를 쓰면 뭐 굉장한 듯이 우리 할매들 오매들 기죽여 목사를 신으로 떠 받들게 만드는데 한 몫 거드는 의도가 다분한 한자용어임다, 즉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고 바울은 말하는데, 예수와 같은 젖을 빨면서 자란 동생 야고보는 그게 아니라네요.

예수가 엉아인가 야고보가 엉아인가는 호적을 들여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동생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동정녀 상태에서 예수를 낳았다고 사람들은 믿으니까, 만일 야고보가 엉아이면 마리아 = 동정녀 = 구라의 등식이기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설사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마리아는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을 낳았으니까 영원한 동정녀는 될 수 없고요,,, 우리의 두뇌세포를 완전 마비시키는 성경 기사입니다요. 그건 그렇고요.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그 어디에도 예수가 일으킨 기적 혹은 기적같은 현상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물고기 두마리 빵 다섯개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인 사건, 이 정도면 팔레스타인 땅 구석 구석 모르는 이들이 없을 텐데요. 로마 황제를 주군으로 삼는 로마시민으로서 예수가 내 삶의 주인이라고 목숨 내놓고 복음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로 부터 나온다 라고 주장하던 바울, 그가 쓴 많은 편지에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예수의 기적사건 한 껀 쯤은 써놓을 법도 하건만…… 그래요, 같이 옆에서 살을 부대끼며 한 지붕 밑에서 산 예수의 피붙이 야고보의 말에 무게가 더 실릴까요 아니면 레이져 광선 쬐끔 쐬고 나도 사도다를 외치는 사람의 말이 더 무거울까요 ?

Didache, 헬라말이라네요 대다수의 기독교도들, 특히 광신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영어발음은 디더키, 뜻은 가르침, 교훈 이랍니다.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이라는 뜻인데요, 초기 기독교 문서입니다. 대체로 빠르면 ad 40-60년 또는 1세기 후반 내지는 2세기 초반 그러니까 ad 50년 – 150년 사이에 기록된 저작물입니다. 세계에 흩어져 사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 매뉴얼 이라는 것이 정평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바보스쿨에서 알게되다니, 여러분 출석하시는 교회 목사로 부터는 좀체로 듣기 힘들껄요.

12사도들 가운데 유독히 바울 편지만 성경에 더 많이 실렸을까,,, 평등 따지기 좋아하는 우리민족 정서상 성경 제본자는 분명코 편파적이었지요 ? 열두 사도 – 예수를 보고 만지고 그와 말싸움도 했고 심지어 대들었던 사도들의 가르침을 적어놓은 성경 밖의 문서 Didache 앞 부분에,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남들이 너에 대하여 어떻게 했는데 네 맘에 안들면 너 역시 남들을 대하여 그렇게 하지 마라. 이름하여 기독교 황금률이지요, 사실 저는 이것은 유대교의 그것을 그대로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유대인 랍비 힐렐이 예수 탄생 이전에 이미 다음 처럼 말 했거덩요.

남들이 너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네 맘에 들면 남들을 향하여서도 그리해라, 다시 말하면 위 기독교 황금률은 유대인 랍비 힐렐의 말을 부정(negate)문 형태로 전환했을 따름이기 때문이지요.

예수께서 이 것을 성전에서 아니 배우셨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의 입을 빌은 추종자들의 말이라는 것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뭔가를 “해라” – 실행에 옮겨라, 행함에 옮겨라 이런 거 아닌가요. 5천명을 멕인 사건도, 예수는 군중이 배고픈 것을 아시고 실제로 그들에게 빵을 주셨고요 행함에 옮기셨네요. 지난번 구역예배시간에 언급했던 38년 앉은뱅이도 예수께서 일어나 가라고 말씀했더니 그 앉은뱅이가 믿고 그 스스로 일어나서 행동으로 즉 행함으로 옮겼기 때문아닙니까 ? 예수께서 부축해서 잘 걸어가게 하셨다거나 앰뷸런스를 불렀다는 기사는 없네요.

그리하여, 야고보서 기자는 바울의 주장에 대해 다음처럼 일갈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서두에 스크랩해 두었던 UPI 신문기사 이야기로 돌아가십시다.

이 기사의 같은 사건을 전한 다른 인터넷 매체의 글 가운데 한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Someone should tell the church that on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s that God gave people doctors to help heal them. God’s giving you medicine; take it!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라고 의사를 보내셨고 약도 주셨다 그러니 먹어라 즉 행함에 옮겨라’ 이 역시 성경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임을 교회에 누구가는 반드시 말해야 한다.”

정상적인 사고행위를 하는 목사들이야 그럴리 없겠지만, 위 기사로 보면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로 강짜를 부리는 목사들의 구라는 아직도 강단에서 멈추지 않고 있음을 기사는 전합니다.

얼마전 순복음교회 신도들이 조용기 재판을 앞두고 무죄 간구 기도회를 가졌다지요 ? 결국 유죄판결 났으니까, 기도를 게을리 했거나 기도하면서 의심했거나 아니면 원래 믿음이 없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행함이 없었거나,,,,,, 무슨 행함 ? 조용기가 음부에 들날날락할 조짐이 보였을 때 뛰쳐 일어나 “그건 아니다” 라고 꾸짖는 행함이 없었거나……

야고보서에 이르러 자신들이 그리도 목매어 인용해대던 바울의 주장에 2%부족하다는 것을 감지한 목사들, 황급히 바울 역시 행함을 강조했다 라고 말하면서 바울 서신 이곳 저곳 끄집어 내 억지춘향 짜맞추던 여러분들의 목싼님들,, 되돌아 보십시요.

제가 바울을 부정하고 있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요.

저는 성경에 쓰여진 내용을 그대로 말할 뿐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결국에는 기독교의 대 명제 – 이전 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이 땅에 와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리고 3일만에 부활아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세상에 다시 오시리라. 그러므로 그런 예수 –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 기독교도인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기독교란 이런 것이다 라고 분명히 선언하는 명제에 대해,, 행함이 없으면 그 명제는 헛것 죽은 것이라고 성경의 야고보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독자로 삼았다, 우리는 한민족이지 유대인이 아니다라는 얄팍한 핑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1장 1절에 흩어진 12지파라고 헷깔리게 번역되어 있는데 영어로 보면 abroad 즉 해외에 흩어져 있는 12지파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즉, 바울의 복음 전파 대상인 이방땅의 사람들을 향하여, 즉 바울의 영업구역을 포함한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의 분노를 살 만한 내용이지요.

그런데 억장이 무너지는 일은, 이 야고보서의 행함이 주일성수 봉사열심 총력전도 헌금엄수 이런 것들로 완전분해 신묘망칙하게 재조립되어 교회당을 분탕질을 쳐 놓았으니,,, 우리들의 고명하신 목싼님들이 너무도 황당할 뿐입니다.

바보스쿨 구역예배 야고보를 묵상하는 우리는 지금 멘붕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바울의 믿기만 하면 장땡, 아고보의 행함없는 바울의 믿음은 죽은 것…… 그리고 성경전서.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미묘한 점을 발견하면 멘붕의 상태를 약간 완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은 바울과 야고보의 타협의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엄밀하게 야고보, 즉 예수를 보고 만진 사람들이 주축으로 시작된 예수운동이 레이져 광선을 쬔 바울과 만나는 장면이지요. 그리고 사도행전은 그 이후로 모조리 바울 이야기로 매조지함을 여러분들도 다 아시져 ?

저 위에서 잠간 언급한 디더키 – Didache – 는 열두 사도의 교훈을 모아놓은 목회 매뉴얼이라고 짧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쓰여진 연대는 예수 사후 20년 즉 AD 50년까지 올라갑니다. 예수의 피붙이 야고보의 시대와 같이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야고보서는 예수 사후 바울 등장 이전의 그 짧았던 기간에 있었던 예수운동의 한 단편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제 얘기는 이니고요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또한 도마복음서에는 놀랍게도 예수의 탄생 기적 뭐 이런 것은 없고요, 대부분 그의 가르침과 육성이 그대로 실려 있고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육성 즉 “예수께서 가라사대” 라는 구절 이후에 나오는 예수의 육성(genuine voice)과 거의 일치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또한 도마복음서 발견 이전에, 학자들이 공관복음서를 기반으로 상상속에서나 설정했던 예수 진본 어록 즉 Q문서와도 거의 일치한다는 분석이 이미 세상에 나와 있고요, 세상 사람들은 거의 다 아는 데 여러분만 새까맣게 모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그의 뜻은 제대로 아는가 ?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어도 잘못알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를 따르겠다고,,,,,, 지나가던 새를 웃기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인 소재입니다.

도마복음서가 발견된 나그함마디 도서관 소장물들은 예수 살아 계실 당시에도 읽혔을 수 있는 책들입니다. 예수가, 야고보가, 요한이, 바울이 숨을 쉬던 당시의 책이 발견되다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차오르는 일이 아니런가. 입만 열면 예수 바울을 부르짖는 우리들, 그러나 정작 그런 일들은 순전히 남의 나라 일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요.

오늘 말씀 나누기는 제게는 참 벅찬 본문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이야기, 그것들 보다 더 먼저 혹은 동시대에 서점에 나와 있던 디더키 도마복음서(?) 야고보서,, 그 쓰여진 방법이 너무 다릅니다. 팥은 팥이요 콩은 콩, 팥이 콩이 될 수는 없는 노릇.막말로 예수를 사회운동가 사상가로 그려내는 예수운동 초기의 문헌들, 그리고 신화적인 요소가 너무도 찐하게 스며들어 있는 공관복음서,,,,,, 멘붕입니다.

그러나, 토론토 임마누엘 한인연합교회 정성민 목사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애쓴 흔적 “복음서에 대한, 예수에 대한 탈신화화 그리고 재신화화”의 과정을 우리가 긍정한다면, 붕괴된 멘탈의 잿더미에 한 줄기 희망이 될듯합니다.

말씀 나누기를 마칠 시간입니다. 야고보서는 분명히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지펴두었던 예수운동이 해 받으신 후 그를 보고 만졌던 사도들의 이어 가던 때, 그러니까 바울의 그것보다 더 빠른 예수운동이었고, 우리는 바울에 젖은 나머지 야고보의 이야기를 기억의 너머에 방치해 두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합니다.

“창문 넘어 어렴풋이,,, 야고보”에 대한 3개의 댓글

  1. 구역예배 update 했읍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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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스쿨러답게 머리로 많은 자료를 준비하셔서 즐거웠어요.위에 본문에서 의로 여겨 주셨다고 말씀하시죠?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고는 듣는 귀의년령이…? 자기의행위로 선을 행해서 얼마나 많은사람 들이 돌아오던가요?영어성경 역본은 명령계 가 많은것을 들었습니다.원어성경 코이네헬라어 에서 눈의비늘을 벗게 해 주십니다.예수에서 그리스도로 넘겨 주시기를..하나님의 의 빼고는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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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Re》하나 님 ,
    코이네 헬라어도 좋지만 국어 공부좀 먼저 하세요. “구역예배를 열면서”라는 글이 이해가 잘 안되시나 봅니다. 우리말도 이해를 못하는데 어떻게 코이네 헬라어를 배우셨나요??? 코이네 헬라어는 머리로 안외우고 척 보고 딱 알아냈남요,,, 하나 님께서 원어 성경을 읽으시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은 부러운감도 있으나, 구슬도 꿰야 보석이 됩니다. 순두게님처럼 설교문 하나라도 나누신 후에 그런 말씀하셔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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