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송민호목사-설교비평-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한편의 설교를 듣고 송목사의 설교패턴과 그가 오늘날까지 전파한 복음의 말씀을 일방으로 매도하고자 함이 아님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또한 계속해서 그의 설교를 듣고 필자의 느낀바를 피력하다보면, 저 나름대로의 송민호 목사의 설교패턴의 윤곽을 그리 수 있을 것이고 그때가서 송목사의 설교 전반에 걸친 판단을 내려도 늦지않다라고 생각한다.

교회당 건물, 등록교인 수에 있어서 광역 토론토에, 아니 캐나다에서 가장 크다는 영락교회 웹사이트를 방문했다. 맨먼저 간곳은 담임목사의 설교를 모아 둔 게시판이었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어떤 설교를 들어야할까를 고민하는것은, 잘 찍어 놓은 음식 사진으로 도배된 고급 식당의 차림표를 앞에 두고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몇 초간의 설레는 고민이 있었고, 가장 최근은 아니지만 비교적 근일에 있었던 2009년 12월 20일자로 posting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제목을 클릭하여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물론, 오늘의 본문 말씀이 요한 1서 4장 전체를, 동영상 플레이하기 전에 두어번 숙독했다. 그것이, 송민호 목사의 설교를 듣고 독후감을 쓰겠다고 마음 먹은 필자의 최소한의 도리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4:7-11절 말씀이 송민호 목사(이하 송목사)오늘 설교의 본문말씀이다. 고린도서에 나오는 거의 유행가가 되다시피했던 “사랑은 언제나……” 으로 시작하는 그 구절에 조금도 뒤지지않는 위대한 사랑의 서사시로도 말할 수 있는 Johannine school의 textbook에서 본문 말씀을 뽑아냈다. 요한의 서신서를 읽다보면, 누군가에게 상당한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아니면 시쳇말로 누군가가 요한의 공동체를 “씹는” 상황임을 멀리 갈것 없이 바로 위 몇절 앞에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적그리스도(anti Christ)가 이미 세상에 와 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연이어,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지고지순의 말로 오늘의 본문 말씀이 시작된다.

그러나, 차라리 성경을 읽지 말아야 할것을 괜히 읽었나 하는 회의가 불과 20여분 후에 찾아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의 설교는 결론부터 말한다면, 또 한편의 “부부금슬 증진법” 혹은 “원만한 대인관계 유지비결” 정도의 문화회관 강좌를 듣고나온 기분이다라는 것이 내가 이 설교를 들은 소감이다. 캐나다 최대 출석성도수를 자랑하는 한인교회에서 주일대예배 시간에 선포되어진 설교치고는 글쎄, 별로 들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때가 때이니 만큼(성탄절) 남을 좀 생각하자 라는 마지막 몇분을 남겨 놓고 한 말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자라고 할때, 역시 초등학교 교실에서나 통할 법한 원론적인 “착하게 살자” 정도의 설교다라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다 내리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도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가야하고 이웃을 향해, 그것도 멀리 갈것 없이 내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자존감 – self esteem을 높여야한다는 것이 이 설교의 결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담대히 나가는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명확한 설명이 없었다. 담대히 나가는 것은 무엇이고 나가기는 나가는데 담대하지 않게 나가는 경우는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가라,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퍼뜩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이런 설교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실제로 아무 문제 없다. 또한 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을 수 있다.

설교를 약술해 보면,

** 설교 요지 **

먼저, 그 유명한 요한복은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자. 그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다. 본문 말씀에 나와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먼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계산할 때 지갑만 꺼냈다가 도로 집어 넣는 사람은 남을 대접할 마음이 별로 없는 사람이고, 먼저 내는 사람이 대접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먼저 선물을 하는 것이 더 좋다. 받고 나서 그 답례으로 선물을 하는 것은 선물의 본질적인 의미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 경우에 따라서는 대접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의 실천임을 잘 알고 계시지만 다만 여기서는 예화의 목적상 말을 안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또, 다툼이 있는 곳에서 진정한 화해란, 한쪽에서 먼저 화해를 청하는데도 얼버무리면서 어물쩡 대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있는 자의 행동이 아니다.

“먼저” 사랑을 깨닫기 위해 생각한 것은 내리사랑니다. 내리사랑의 전형인 “부모의 자식 사랑”은 자연계의 철칙이다. (필자의 느낌: 평범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식에 대한 끔찍한 사랑을 말함으로서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 내려 시도한것으로 보여졌다.) 기러기 엄마, 기러기 아빠가 자초한 희생의 이유는 “내 자식이 잘된다면” 하는 한가지 이유이고 이것이 내리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내리사랑이다. (필자의 느낌: 약간은 덜 자연스럽게 화제로 보통의 “우리들” 이야기를 말 하면서 하나님 이야기의 사랑이 바로 내리사랑이다고 말했다.)

우리가 자녀를 잘키우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것은 내자식이기 때문이다. 먼 훗날 자녀에게 잘 대접받으려고 혹은 조건을 걸고 그런 내리사랑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런 내리사랑이다. 하나님은 그런 부모의 천배 수만배 이상으로 지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니 믿으시라. 많이 깨닫고 믿는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내리사랑은 의지와 결단이 담겨있다. 사랑하겠다는 의지와 결단, 그래서 예수를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정도의 의지와 결단,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다, 목적이 있는 사랑이다.

우리가 그렇게 공들여 키워 놓은 자식이 훗날 부모의 사랑을 잘모르는 이유는,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사달라는 것 다사줬는데도 자식이 오히려 배은망덕으로 부모를 대하는 것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자식이 저질러 놓은 일을 무조건 뒤치닥거리만 하는 맹목적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이고 먼저이고 내리사랑이지만 맹목적이 아니다. 죄많은 우리를 사하시고, 하나님앞에 나오라고, 그리하여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사랑을 온전히 체험한 사람은 2가지 방법으로 그 하나님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첫째,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때보다 더 두터워져야한다.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가야 한다. 기도가 않되는 사람은 꼭 풀어야 한다. 금년 말까지 안되면 내년 새벽기도에서 반드시 풀어야한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이 것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다시 관계를 수립하고 넘어가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죄로 막힌 담을 헐어야 한다. 예배때 기쁜 얼굴로 찬송을 하는 분이있고, 하나님께 실망 혹은 기도 응답이 없어서 기쁘지 않은 얼굴로 예배하지 않는 분이 있다. 뭔가 막힌 것이 있으면 해결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엄청나게 사랑하신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든지 그 앞에 나가면 우리를 언제나 맞아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일주일 동안 마음속에 사랑이 넘치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고, 원망 불평불만이면 아직까도 하나님을 잘 모른다. 이웃을 내 몸과같이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x-mas를 맞아 사랑하자. scott peck : 사랑이란 관심을 갖는 것이다. 부부생활, 서로의 성장에 관심을 갖다보면 자존감을 높인다. 반대의 경우 자존감을 건드리고 자존감을 낮추는 말로부터 시작한다.경청하는 자세로부터 나온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자.

** 설교 요지 끝 **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법과 ,인간관계등에 관해 5분여 정도를 할애한 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현하라는 야고보 2장 15-17절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끝냈다.

말은 다맞는 말인데, 옳은 말만 했는데, 어딘가 허전하다. 송목사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 뜻으로, 우리 같은 범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들어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우리들의 생각과 삶이 어차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여 있으니, 그것으로 설명한 것인데, 내가 왜 허전해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송목사가 하나님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 설교의 대부분을 우 리 같은 범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에 할애하여 그 바탕에서 설명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인간의 이야기가 주메뉴이고 하나님은 그런한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위한 부교재였다라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래서 당신들도 사랑해야한다, 이런 명제는 대단히 큰 명제임에도, 송목사의 오늘 설교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에 기초한 성서해석이 바탕에 깔린 설교라고 말하기는 어려울것 같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의 두번째 설명, “일주일 동안 마음속에 사랑이 넘치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고, 원망 불평불만이면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잘 모른다.” 이 대목에서 필자의 마음이 착잡해진다.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불평불만은 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있을 텐데. 필자는 마음으로 묻기를,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 누구하나 의지할 곳 없어서 교회당에 와서 조용히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과연 진정으로 기쁜 마음일까?

하나님 나는 왜 이 모양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 내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습니다., 날더러 어떡하라고요?

그렇게 아프고 상한 마음으로 교회당에 와서 못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데, 하나님은 한쪽에서 기뻐 예배를 받고 계실정도로 그렇게 야비하신, 몰 염치하신,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백성이 굶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쓰고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도, 기쁜 예배만 흠향하시는 분이 과연 사랑의 하나님일까?

몇 주전에 Haiti 참사가 있었다. 그들의 불평불만은 정당성을 결여한 것일까? 하나님 나 괴로워요, 이렇게 불평불만을 하면 안되나? 엘리야가 하면 부르짖음이고 내가 하면 불평불만이라, 필자의 너무 심한 비약인가?

예수께서 해받으시고 승천하신 후, 물경 6-70년이 지난 시대를 살아갔던 요한의 공동체, 그들이 당면하고 있었던 문제를 풀어 나가는 시대에 쓰여진 이 서신서로부터, 예수때문에 유배가고 예수때문에 네로의 정원으로 잡혀가 산 채로 화형을 당하면서 타들어 가는 그 불빛으로 네로의 정원을 밝혔던 그 쓰라린 핍박과 박해를 뚫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절규가 바로 예수가 내린 명령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임을 밝혀내는 일이 송 목사에게는 역부족이었을까?

소녀 취향의 듣기 좋은 말들만 뽑아 나열한 송 목사는, 우리들의 하나님과의 공식적인 교제행사인 예배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인간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음으로서, 전적으로 중심이 되어야 할 그분을 구경꾼으로 전락시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허전했다.

“영락교회-송민호목사-설교비평-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한 한개의 댓글

  1. 첨언: (송목사 설교와 관련없음)
    요한일서 강해 설교를 검색하여 동영상 몇편을 들어보려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 요한복음 요한1,2,3서와 요한계시록을 요한사도가 집필했다는 목사의 강변에, 나는 더 이상 할말을 잊었다. 요한 2서 3서 맨 첫줄에 보면 “장로는…” 이렇게 시작함으로서 작자가 분명히 no-name “장로”라고 밝힌다. 그렇게 말하는 목사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면, 요한사도라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면서, 한편으로는 요한장로라 부르는 것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목사들이 요한의 서신들을 세밀하게 안읽었다는 증거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요한1서는 요한이 기록했다는 것에 대체로 동조하나(전적인 동조가 아니라 대체로), 2,3서는 아니라는 쪽에 더 무게를 둔다. 그 말도 맞는지 나는 모른다, 맞다 틀리다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교계내에서 조차도 논란거리가 될 만한 것임을 어느정도는 짐작할 수가 있음에도, “요한복음 요한1,2,3서와 요한계시록을 요한사도가 집필했다”는 목사의 강변은,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하고도 남음이 있다. 성경을 일단 문자적으로라도 이해를 해야 그 다음에 성령이니 뭐니 얘기가 해석을 통해 입으로 나오는 것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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