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송민호목사-설교비평-그리스도를 높이는 삶

송목사의 오늘 설교 제일성은 이렇게 시작했다. “성가대의 찬양처럼 우리의 마음이 활짝 열리고 오늘의 메시지를 통해 여러분께서 큰 힘을 얻으시기를 바란다”

지당한 말씀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정한 엿새는 일하고 하루는 안식일로 지키라는 명령에, 이름하여 “순종”이다. 과연 그럴까? 송목사가 생각하는 메시지란 무엇일까? 설교 말미에, 송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가리켜) 지금 나가고 있는 메시지에 두 가지 부류의 반응이 있다고 말을 했다. 송목사가 의도했던 오늘의 메시지 – 전혀 현실성도 없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경해석은 빈약하면서 성서구절을 적절히 인용한 뜬구름 잡는 원론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필자가 아는 “메시지”란 말의 정확한 뜻은, 이러하다. 우리는 인생에 한번쯤은 영화관에 간 적이 있을 것이다. 영화는 시작되고 뜻 모를 장면이라든가, 배우들의 언사, 사건들이 짧은 영화는 한 시간 반 길게는 두어 시간 동안 스크린에 흘러가면서 감독과 작가의 상상 속으로 우리들은 빠져들어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흥분이 되고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고 슬프고,,, 즉 내가 주인공이 되고 만다. 관객인 우리는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 까지도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지 못한 채 자막이 올라 갈 때쯤에서야 “아-! 이것을 말하려 했구나” 하면서 마음 속에 뭔가 메아리 쳐 오는 것이 있음을 느낀다. 바로 그것이, 그러한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필자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메시지”의 참 뜻이다. 아마 이것은 사전적인 의미와는 약간 다를 수도 있겠지만, 설교, 강연, 영화 혹은 소설 같은 쟝르에서 말하는 의미에 훨씬 가까우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본말이 전도 되었지만, 이것을 거꾸로 목사의 설교행위에 대입을 해보면, 설교를 듣는 중에는 청중인 나는 설교자의 (말씀인용작업이 아니라) 말씀해석작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세계로 빠져들어가 오늘 한 시간 나의 삶을 온전히 그의 세계에 안치시킴으로서, 설교를 듣고 난 후부터 또 다른 엿새를 살아가기 위한 “뭔가”를 얻음이 바로 설교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교회 가고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기도하고 독서하고 성경 읽고,, 그러려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일주일에 다음 주일 설교를 위해 한편씩 논문을 써야 하는 것이 목사의 할 일이다.

대학을 졸업했다는 송민호목사가 어떻게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어울릴만한 설교를 일주일 동안 고작 준비라고 한 것인가 묻고 싶다.

하나님은 12지파 중 나머지 열한지파가 레위 지파를 지명하여 먹여 살리라고 쓰여 있는 성경말씀과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우고를 떠나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에 관한 문제이다.

오늘 설교를 듣고 얻은 슬픈 분노이다. 누구는 6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죽어라고 일하고 목사는 거의 놀다가 설교 수 시간 전에 옛날 보고들은 이야기나 짜깁기하여 설교 준비 끝내고,,,,, 하나님의 공의는 하수구에 쳐박혀버렸다.

송목사를 비롯한 모든 목사들은, 가슴에 손을 얹으시라. 그리고 그대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양심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라. 양심이 내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 즉 “메시지”를 듣겠는가, 그저 필부에 불과한 필자의 충고이다.

이런 저런 교회일로 바빴다고 핑계치 말라. 그런 일들을 위해 장로 집사가 있음을 그대들은 더 잘 안다. 목사는 설교 이외에 어떤 일도 우선일 수가 없다. 연극배우조차도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그 시각에 무대에서 관객과의 약속을 지킨다.

그러나, 필자의 분노를 훨씬 넘어 서는 것이 있으니, 그러한 설교를 듣고자 매주 기천명씩이 영락교회에 모여든다는 엄연한 사실에 필자는 절망에 가까운 신비감에 사로잡힌다.

오늘의 송목사의 설교로 가보자.

성숙한 크리스천의 삶이란 “나는 가면 갈수록 더 낮아지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그리스도는 더 높아지고 그리하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높여진) 그리스도를 보고 더욱 더 은혜를 받게 하는 삶”이다 라고 송목사는 말한다. 매일매일 주님 중심으로 살려 하지만 내 안의 옛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에 옛사람의 타락한 근성 때문에, 말로는 주님께 내 삶을 다 드렸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 삶을 다 갉아 먹고 만다, 그래서 성숙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송목사는 말한다.

우리는 이에 대해 우리내부 보다는 외부문제로 구실을 돌림으로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변명을 한다고 송목사는 말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것은 내 안의 문제 즉 옛 사람과 결탁한 나 자신의 문제라고 송목사는 진단한다. 외부에 있는 핍박과 유혹과 어려움이 내 안에 있는 옛사람과 결탁할 때 문제가 야기된다고 송목사는 말한다. 그래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경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고 청중에게 결의를 다질 것을 송목사는 요구했다.

대단히 지당한 말로 들리지만, 필자가 듣기에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원래부터 타락한 근성이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여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질책이 송목사의 요지이다. 그렇다면, 송목사의 또 한번의 죄책감 씌워주기에 불과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저 그런 Déjà vu(데자뷰 : 맨날 그모냥의 시시한) 그 자체이다.

사실,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높여라” 한 적이 없다. 그는 스스로가 죄인의 친구였고 간음한 여인의 친구였다. 마시기를 즐겨하고 먹는 즐거움도 그의 삶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필자 보다 송목사는 더 잘 아실텐데. 왜 자꾸 예수를 절대화 하는 지 필자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는 “예수”를 가리켜 그냥 “예수”라고 쓰여있다. 왜, 목사들은 “예수님”이라고 자꾸 읊어대든지, 정녕 그렇다면 “예수께서” 정도가 알맞다.

우리가 아버지를 “아버님”으로 부르는 순간 아버지는 나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을 필자는 밝혀두고 싶다. 왜 “하나님 아버지”인가, 그런 논리라면 “하나님 아버님”이 맞지 않겠는가? 예수를 절대화하려는 송목사의 관행적(complacency)인 언어생활이 오늘 설교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 예수께서 “높여달라” 그런 부탁이나 명령 하신 적 없는 것 같은데요, 송목사님.

비록, 동 떨어진 이야기이지만, 송목사께서 담임하고 있는 영락교회 벽에 걸린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에도, 요한은 천진난만할 뿐이다. 거기서 “열중쉬어” “차려” 이런 것 없다. 심지어 어떤이는 dagger(단검)까지 들고 있다. 왜 유독 한국교회 목사들만 “예수절대화”에 혈안이 되어있는지, 필자는 그들을 향하여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는 거의가 다그렇게 부르니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목사는 한 술 더 뜬다. 나와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외부의 핍박 유혹 이런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어는 순간 시기 분쟁 질투 다툼가운데 자신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주님을 높이기 보다는 나 자신을 높이는 추함을 발견하게 된다고, 송목사는 평신도 때리기 정도의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을 이어갔다.

설교시작 5분여 만에 송목사는, 오늘의 본문 말씀의 주인공 바울이 로마에 감금되어 있을 때, 자신에 대한 평가가 둘로 나뉘어 있음과, 변명을 할 수 없는 현실을 악용하는 무리들의 주장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워하는 심정의 토로가 본문의 내용이라고 말을 했다. 이 말 끝에, 송목사는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자신을 드러낼 수가 있을까 이것이 대단히 놀라웠다고 말을 했다.

필자는 송목사에게 묻는다,

진짜 놀라웠는가?

진짜로 놀랐다면, 송목사는 대단히 순진한 사람이거나 혹은 날 때부터 평신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전도사였을 것이다.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교인들간의 반목관계는 둘만 모이면 언제나 있었고,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필자가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교회가, 아니 목사가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타협하는 기술을 성도들에게 가리켜 주지 못한 것”이다.

다투고 있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쪽이 설령 합리적이라도 목사마음에 안 들면 덜 합리적인 다른 쪽의 손을 하나님 성경 예수라는 제목으로 들어 주었던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는가? 그럼에도, 오늘 또 교인들의 잘못이라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을 살지 못한다고 설교 서두부터 조용한 목소리로 송목사는 청중들을 윽박지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필명이 순두게이다. 순두게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이 유오디아이다. 그 둘은 서로 복음 사역에 있어서 반목했고 결국 바울도 이 사실을 알고 그 두 사람의 이름을 성경에 올려 놓았다. 바울은 말한다. 그 둘 다 생명책에 녹명되어있다고 말한 것을 필자는 성경에서 읽었다.

필자는 이러한 성경에 나와 있는 사실에서, 고작 둘이 싸우는 것은 주님을 높이는 행위가 아니니 한마음으로 통일해라 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겠지만, 서로 다른 길로 하나님을 만나는 두 사람을 바울도 인정했다라는 가르침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xx신학 yy신학 zz교단 등등 서로 다른 길에서 하나님과 예수를 만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다 라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필자는 송목사의 유치한 주장을 Déjà vu 그 자체, 초등학교 2학년에게나 어울릴만한 전달사항이라고 판단한다.

실제로 영어성경에는 “agree with each other”라고 되어 있는데 한글 성경에는 “같은 마음을 품으라”라고 쓰여있어 통일 좋아하는 한국교인들과 목사들은 “(성전 건축을 향하여)한 마음”을 품으라고 오해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의 의견에 의견을 같이해라 이말이지, 둘 중 하나의 의견은 깡그리 무시해라 이말은 아닌 것으로 필자는 이해한다.

그러면서 송목사는, 그러한 문제를 교회 안으로 끌고 갔다. 어쩌면 그렇게도, 아줌마들의 정신을 황폐화 시켜버리는 쓰레기 막장 드라마의 이야기 전개 방법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말인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송목사가 이 말 할 때 필자는 혹시 교회 봉사 이야기 꺼내는 것 아닌가 하는 예감이 필자에게 있었는데 송목사는 필자의 예측을 어김없이 적중시키고 말았다. 멀쩡히 봉사를 잘 하다가 성도들이 나뉘어져 패가 갈린다고 송목사는 교인을 향해 한마디 툭 던지듯이 말을 했다.

이것은, 요즘 목사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시시콜콜 다 이야기 하면 근본주의자이니 광신자이니 이런 소리는 듣기도 싫거니와 나는 적어도 그런 부류의 성직자는 아니다라는 복선이 깔려 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알아서 기어 주십시요”.

빌립보서의 1장 서반의 배경을 근거로 옥에 갇혀 운신의 폭이 좁은 바울을 공격하는 무리들을 향한 바울의 “나를 밟고 넘어서라도 예수가 전파되면 좋겠다”는 고백을 송목사는 칭찬했다. 그렇지만 듣는 필자는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영락교회 교인들은 모두가 성경에 해박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모르지만, 누가 어떤 내용으로 바울을 공격했고 그것의 당위성 부당성 이런 말들을 듣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없고 그냥 무작정 바울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에게만 송목사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것도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청중들에게는 “그냥 그런 게 있어 믿어!” 와 같은 abandon 자체였다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필자가 아는 바울의 최대 고민은, 예루살렘 교회의 소위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주동이 된 예수의 제자들로서의 사도들이 바울을 견제했던 것이 아마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안하고 “주님을 높였다” 그래서 “멋있다”라는 설명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걸 장년들을 상대로 하는 설교라고 계속 들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필자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살던지 죽던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히1:20)”를 송목사는 두어번 읽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여러 번 읽었지만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라고 송목사는 청중을 향해 완곡히 강권하는 느낌을 받았다. 목사 자신이 경험했던 느낌인 “가슴에 와 닿을 정도의 이야기”는 굳이 설교시간에 들을 일 없다. 성도는 목사 개인의 “감성”을 알고자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세계로 청중을 이끌어 가기에, 송목사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이 한편의 설교만 놓고 보면, “역부족”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송목사는 여기까지 전체 설교 러닝 타임 32분의 11분을 소비한 후, 물경 전체 설교시간 25% 정도의 8분가량을 자신이 감동으로 보았던 영화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본 영화 이야기는, 올림픽에 출전한 영국 선수가 일요일에 경기 스케줄이 잡혀있어 그리스도인이었던 주인공은 주일성수를 위해 그 경기를 포기하고 주중에 있었던 다른 종목에 출전 우승 금메달을 목에 건 후 바로 중국 선교를 떠났다는 아주 고전적인 기독교 영화이야기였다.

그러한 이야기를 송목사는 자신이 설교초반 10여분에 걸쳐 설파한 바울의 반대세력을 자세한 설명도 없이 비난하여 바울의 정신세계를 한껏 띄워 은근히 청중에게 죄의식을 심어줄 만큼 같은 정도의 무게를 영화이야기에 쏟아 부었다.

필자는 여기서 송목사의 정신세계라든가 그의 학문적 깊이 이런 것들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만일 필자의 이러한 의구심이 잘못 된 것이라면, 송목사는 교인들 눈치 보기에 급급한 설교를 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유치부 혹은 아동부에게나 어울릴 만한 “착하게 살자, 전도하며 살자, 주일 성수하며 살자” 이런 류의 설교를 송목사는 할 수가 있을까.

송목사는 지루한 영화 이야기에 이어,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높이는 것일까에 대해 청중을 향해 일종의 훈계를 늘어 놓았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를 낮추는 것이 예수를 높이는 삶이라고 송목사는 말했다.

내가 귀하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높임을 받을 기회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신중하게 나를 높일 것인가 예수를 높일 것인가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북미에서의 개인의 권리는 결코 침해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권리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성도들이 보내는 support를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었으나 포기했다 등등 별로 현실적이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원론적인 이야기들만이 필자에게 공허하게 들려 왔다.

송목사는 가끔, 본문을 또 인용했다. 바울과 주변 동역자들에 관한 투기와 분쟁과 반목의 이야기를 들어 송목사 자신이 오늘 설교제목에 맞게끔 의도적으로 바울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을 깍아 내려 상대적으로 바울을 높이 보이게 하고 있다. 그런 내용 정도의 성경지식은, 그냥 성경 책 한번 읽어 보기만 해도 중학생 정도의 국어 독해력을 가진 학생이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송목사는 그것이 자기가 발견한 대단한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처럼 청중을 호도하고 있다. 바울의 어떤 말을 왜 누가 문제 삼아 그의 동역자들로부터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었는지 송목사는 도무지 한마디 말이 없다.

물론 거기에는, 목사들이 바울 바울 하도 입에 달고 다녀 그를 절대화한 나머지 바울의 신학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의 이단시 하기 때문에 송목사는 그런 것에 휘둘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박 겉만 핥아 보고 수박의 속까지 먹어 본 듯한 설교를 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했다.

계속해서 나의 권리를 포기하면 자유하게 된다고 송목사는 말했다.

내가 가진 권리, 슬픔 고통 이런 것들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노예가 된다는 송목사의 주장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간혹 바울의 고백을 곁들였다. 23분이 지날 무렵에는 10여 년 전에 선교사로 파송되던 일을 예화로 이끌어 냈다. 예수님만을 보고 갔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고 송목사는 회상했다.

너무 복잡하게 이것 저것 생각하지 말고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분들 중에는 지금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얼굴이 밝다, 어떤 분들은 장례식장에 온 것 같다, 이것은 설교자인 내 책임이 아니라 여러분의 책임이다, 똑 같은 메시지가 나가고 있는데 듣는 이에 따라 다른 이유는 단순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송목사는 강변한다. 이쯤 되면, 송목사는 이름하여 “자아도취” “자기최면”에 걸려 들었다는 생각이 필자에게 들었다.

그리고, 약간 우스운 것은, “지금 메시지가 나가고 있는데…” 라는 송목사의 말이다. 위에서 필자가 메시지에 관해 잠깐 언급했듯이, 메시지는 “자 지금 메시지 1번 나갑니다” “이번에는 2번이요” 와 같이 중국집 주방에서 짜장면배달 청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데, 스스로가 “자 지금 메시지 나갑니다” 라고 말을 하니 필자가 웃을 수 밖에. 그리고 그 메시지라는 것도 별게 아닌 착하게 살자 정도 밖에는 안되는데, 이러한 냉소의 웃음이 필자의 얼굴에 짧은 시간이나마 스치웠다.

권리 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정을 받아야 하는 권리를 포기해라, (목사가 마땅히 할 말 못 찾으면 하는 단골소재인) 부부싸움의 예를 송목사는 들었다. 주님이 나를 인정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약간 심술 맞은 질문을 송목사에게 해야 하겠다. 수년 전에 금란교회에 출석하는 김홍도라는 사람이 여자성도들과 간통과 금전 문제로 법정에 가서 일부 패소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경우에 김홍도씨에게도, 송목사는 권리포기 이행을 주장할 수 있는가?

두번째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권리를 포기하라고 송목사는 말했다. 진실이 안 밝혀져 죽은 사람은 어떠냐, 이에 대한 송목사의 답은 이랬다.

“그래도 괜챦다.”

참으로 무책임한 송목사의 발언이다. 송목사 가족중에 그런 사람이 있어도 그런 말을 하시려나요?

복음서가 어떠한 맥락에서 쓰여졌는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성도들의 정신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언사는 할 수 가 없을 것이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권리를 포기하면, 사도 바울이, 마가가, 누가가, 요한이 그랬더라면,,,,,, 송목사는 답이 없을 것이다.

자! 여러분, 예수님을 높이는 삶을 살으십시요,, 이것이 지금 나가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성경 구절 끌어 들여 읽어 주고 또다시 “자! 여러분, 예수님을 높이는 삶을 살으십시요”,, on and on

송목사는,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암구호 같은 “전달사항”과 메시지를 구별을 잘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이 설교로부터 필자는 받았다. 하긴 메시지도 전달사항이군요.

오늘 송목사 설교는 본질에 있어서 너무나 교묘하게 벗어나 있다. 해석이 없는 적당한 성경구절 인용, 심하지 않게 보이는 죄책감 씌워주기, 그럴 듯한 훈계, 그리고 장황한 영화이야기 이런 것들로 점철된 별로 먹을 것이 없는 자기주장에 불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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