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준비하면서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과연 갈라디아서는 몇일동안 아닌 몇달동안 걸쳐서 쓰여졌을까?

몇달 아니 몇년동안 쌓아 두었던 것을 단 한나절만에 썼을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유는, 바울의 엄청난 분노가 제 마음에 그대로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대헌장인가 자유헌장인가 아뭏든 그렇게 불리는 갈라디아서가 분노의 서신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저주한다, 면책한다, 책망할 일이 있었다, 누구든지 날 괴롭히면 맞는다?!, 심지어 예수의 수제자의 이름이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분노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사람들은, 즉 작자는 바울이요, 그리고 또 한편 바울과 같이 비록 거짖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명색이 복음 전도자들, 편지를 읽은 사람들은 갈라디아 거주민들이긴 하지만 주로 아마 사제들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갈리디아 사람들아 어리석다 라고 말하여 자칫 편지의 내용이 일반 교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잘 들여다 보면 이건 목사 자기네들끼리의 이야기 입니다.

오늘날로치면 목사와 그가 몸담았던 신학대학의 교수들을 한 그룹으로 하고, 즉 학파 혹은 학풍이라고 억지로 이름을 붙여 편리한 예제를 삼는다면, 갈라디아서는 그러한 학풍간의 설전입니다. 다시말해 (평신도를) 가르키는 사람들끼리 니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입니다. 저는 언제나 평신도, 평신도가 들어 갈 자리는 없어 보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말입니다. 지금 평신도를 어떻게 어떤 논리로 가르킬 것인가 그것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과는 성격이 다른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니, 왜 당신들, 사제들, 목사들 싸움질한 것을 편지로 남겨 우릴 머리아프게 하냐고!” 당신들끼리 따로 만나서 의견 종합한 후에 하나님께 담판지었으면 될일이지, 그리고 이문제에 관해 매뉴얼 두권 – 하나는 교사용 하나는 성도용 – 뿌렸으면 될이지 왜…… 물론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이지요. 아니 그걸 왜 평신도인 우리에게 고자질하냐고요? 베드로를 평신도인 우리에게 씹어서 뭐 좋을 게 있다고요…… 물론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이지요.

저는 바울을 그 정도로 상황인식을 못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유명한사람들 남들 보는 앞에서 약간 덜 쩍 팔리라고 프라이빗 레슨을 해주어 배려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서신은 분명코 복음사역자들을, 그런 전도사들에게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편이 서로 싸우는 내용이 들어간 편지를 보고 내가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이말씀이지요. 그 내용이 다만 보석이기에 나의 분노는 한낱 티끌로 조차도 아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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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한반도에 들어 온 이래 우리의 손끝에 닿을 수 있는 역사 가운데, 기독교도로서 너무도 부끄러운 사건들,,, 여러분은 어쩌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일제의 신사참배, 독립군 때려잡던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독재정권에 아첨 내지는 침묵, 광주학살때 또 다시 침묵 그리고 학살자들을 향해 목사들이 행했던 축복기도,,, 등을 꼽습니다. 철저히 기독교도 관점에서 말이지요.

한국의 개신 기독교는 아직도 신사에 참배한 것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정도 안합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한국 기독교는 “현재 계속해서 배교하고 있는 중” 이라는 간판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말씀. 이런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과거 독일기독교가 히틀러시절 침묵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히틀러시대가 끝나자 그 사실을 인정하고 회개한다고 말하면서 3년간 목사들이 목사직하지 않고 자격증 반납 했습니다. 이말은 이들도 우리처럼 똑 같이 밥벌어 먹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교회돈 안받았다는 말씀.

부끄럽게도 신사참배한 일로 단 세시간도 목사직에서 떠나 본 일 없는 우리 기독교, 세월이 가면 저절로 잊어/혀질 줄 알고 있는 철딱서니라고는 개미 발톱에 때만큼도 없는 우리 목싸님덜,,,, 아 –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제가 트랩에 걸려 들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 27-28장 설교준비하면서 말입니다.

27-28장만 놓고 본다면, 예레미야는 신사참배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던 역할이었습니다. 하나냐는 그 반대의 주기철 목사 같은 역할입니다. 죽은 한경직이가 자신의 신사참배사실을 40년동안 숨기면서 목마른 우리집 강아지처럼 찾아 다녔던 그 면죄부를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죽을 맛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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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3ch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 가운데 저 자신을 비롯하여, 성경은 대단히 어렵다고 말씀들 하십니다. 어렵다고 생각하여 계속 어려운 상태로 놔둔다면,, 그것보다는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한번 시도나 해보자, 누군가는 이곳을 발견하여 같이 가겠지,,, 이런 생각이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프로가 아닙니다. 이미 어느정도는 점수(?)를 벌고 들어갑니다. 조금 잘못되더라도 평신도니까 하는 자만(?)심도, 비빌 언덕도 가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설교준비하면서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에 대한 한개의 댓글

  1. 분노! 주님안에서..복음이 자기자랑이나 누구를 가르치는 현장이 아님을 알려주셨기에..이런모음이 탄생? 자연스럽지요..
    여러분들이 읽고계시는 성경에도 ?? 이 묵상으로이어져야 라고 전하고 싶습니다.1611년,king janes bible역본에서,
    얼마나 다르게 전해짐을 원어성경에서 확인할수있습니다..더 낮아지게 인도하십니다…정죄와권면은 틀리니깐…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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