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장로교회-박헌승목사-설교비평-본이 되는 교회

오늘 비평은, 2010년 11월 7일 본한인교회에서 행한 미시사가 서부장로교회의 박헌승 목사의 “본이 되는 교회” 라는 제목의 주일 설교를 그 대상으로 한다.

이 설교 비평을 위해 필자는, 여러번 동영상을 반복해서 들었고, 참담한 마음으로 이 설교는 한마디로 “가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직접적인 이유:

박목사가 시무하는 미시사가 서부장로 교회는 본한인장로 교회에서 직선거리로 40여킬로미터가 채 안되는 곳에 위치한다. 박목사의 사택은 어딘지 모르겠으나, 그가 이 설교에서 주창한대로 교회가 중심이지 성도가 사는 집이 중심이 아니라는 논리로 본한인교회 미시사가 서부장로교회 두 교회를 계산 근거로 삼았으니 집(사택)이 멀다거나 이런 이유는 이미 박목사에 의해 사전 봉쇄되었음을 밝혀둔다.

박목사가 자신의 집으로 부터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본한인교회의 강사로 초빙 받은 부흥회 마지막날 주일 대예배 설교에서, 이 설교(필자주: typo error 수정 dec 11 2010)가는 이렇게 진술한다.

“고급 호텔에서 2박3일간 숙박하고 오늘 아침 짐싸들고 나왔다”

그러니까 본한인 교회에 부흥강사로 가면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교회에 가는 것처럼 교통비/숙박 기타 체재비를 누군가에게 받았다는 뜻이다. 40여 킬로 떨어진 교회에 부흥회 가는데, 호텔에 가서 자고 거기서 아침 먹고 본한인교회로 가고 오고 가고 오고……

“같은 도시에서 집회하니 집에서 왔다 갔다 하여 다만 얼마라도 교회돈 축내지 말아야지” – 의당 그러려니 했던 필자의 순진한 생각이다.

박목사는 교회에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온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헌금했다. 지금 그 돈으로 돈지랄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집에서 왔다 갔다 하기 힘드니 잠잘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 시골교회 믿음 좋은 성도가 사랑방 내주고 서울서 온 부흥강사 거기서 자고 부흥회 설교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주의 일 하라고 맡긴, 아니 반드시 바쳐야 된다고 하여 바친, 그 “돈”에 대한 이 작자들의 “인식의 폭(perception)”을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있다. 이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 어떤 한마디에도 우리가 어찌 신뢰성을 부여하겠는가? 필자가 보기에는 설교가 아니라 교설, 가짜라는 말이다.

필자가 묻는다.

“그대 교회가 위치한 미시사가 빌딩 숲이 창밖에 펼쳐지는 고급 호텔에서 자고 먹으니 좋았더냐?” “새벽마다 주의 종을 위해 기도하라고 세뇌당한 성도들의 새벽기도의 결과이더냐?”

필자의 답이다.

“돈지랄 하지 마라, 교인들이 그 돈 진짜 드럽게 벌어 헌금한거다… 당신이 목사라면 빌립보서와 고린도 후서를 오백번 읽어라. 그래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계속 목사해라. 아마 이를 갈며 목회를 할 것이다. 만일 이해하거든 조용히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고 시간당 10달러짜리 일터에 가 있을 것이다. 그때 거기서 예수를 만나게 될 것이며 그대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 밥통으로 흘러갔던 밥한톨이 성도들의 눈물이었음을 알게 될거다. 그 때 사람들은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만약에 본한인교회에서 비용일체를 부담했다면 – 사실 어느 교회에서 부담했는가 이것은 하나도 중요치않다) 이번엔 주는 쪽이 더 밉다. “본한인교회 재정 담당 장로님, 박목사 사례비 및 비용에 관련하여 수표에 숫자를 쓰실 때 뭐 좀 느끼는 게 없었나요?” 그 교회에는 다 부자들만 모여 있나요? 아 – 부자도 아주 떼부자들만요???

초록은 동색이라고 둘다 똑같다. 두 교회가 아주 짝짜꿍 손발이 척척이에요.

이러한 정신세계에서 놀고 있는 박목사,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서, 아멘약 과다복용 증세에 시달리는 분으로 부터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아니, 박목사가 자기가 낸건데 왜 그러쇼????”

그러나, 이경우에도, 자기가 내는 돈이라도, 그 돈의 원천은 교인들의 호주머니이고, 어려운 지경에서 고통당하는 교우들을 위해 단 한번만이라도 진실된 기도를 했더면, 그렇게는 못하는 법이라고 필자는 교회에서 배웠다. 목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못한다. 기도는 커녕 아예 관심도 없다는 것을 박목사는 스스로 말하고 있지않은가.

이유 끝.

박목사는, 이 설교를 통해 “밖에서 새는 바가지는 안에서도 반드시 샌다”는 역설을 필자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글쎄,, 그냥 그런 설교 아니 요절암송 뽐내기정도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세뇌시켜버린 서부장로교회에서면 족했을 것을 굳이 밖으로 나댕…….

필자는 오늘 박목사의 설교를 간단하게만 약술 하겠다. 이유는 무수한 성경 구절 끌어 대는 것을 설교라고 착각하는 박목사가, 자신이 어렸을 때 매년 주일학교에서 요절 암송대회 나가려고 준비했던 암송구절을 지금껏 우려먹는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결론 때문이다.

박목사는, 찬양을 듣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자며 박수와 마음에도 없는 ‘피부가 곱네요’ 이런 인사를 청중 각자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설교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의 거의 잡담 수준의 – 평신도가 하면 잡담이고 돈받고 하면 설교가 된다 – 지루한, 그러면서 별로 흥을 끌만 한것이 전혀없는 엔터테인먼트를 시작했다. 이에 마음에서 우러나서인지 어쩐지 본한인교회 교인들은 연신 아멘이다. 청중가운데 아멘약 과다복용증세에 시달려 판단력 상실이라는 부작용을 보이는 환자들이 상당수가 있음이 동영상 너머에서 들려온다.

재미있는 교회 아름다운 교회 행복인 넘치는 교회, 교회와서 조차 즐겁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교회는 참말로 좋은곳 이다, 중요한 곳이다 이러한 자기의 감성적인 말을 늘어놓으며 드디어 박목사, 성경구절 끌어오기 스타팅 방아쇠를 사도행전 20장 28절로 당겼다. 박목사, 진짜 성경 요절 암송만큼은 대단하다, 바로 필자가 생각하던 요절을 정확하게 장-절을 들이대니 말이다.

그런데 내용이 너무 충격이다. “피값 주고 사신 교회”, 박목사는 이래서 교회가 중요하단다. 독자 여러분, 박목사의 이말에 피가 거꾸로 솟지 않으십니까? 피값 주고 사신 교회들 등치는 자가 지금 “피값 주고 사신 교회”를 입에 올립니다. 그리고 이어진다, “피값주고 사신교회이기 때문에 금보다 은보다 귀하다”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필자는 황당합니다. 행여 이해가 안되시는 분들을 위해 “비 많이 오면 홍수납니다, 여러분!” 이렇게 너무나 당연한 것을 지금 장년예배에서 듣고 깨달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집에서 다녀도,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다녀도 될 거리의 본한인교회에서의 부흥회임에도, 호텔가서 자고 먹는 그리하여 교회돈을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축내는 이 사람의 그런 말이,,,, 더이상 할 말이 없읍니다. 궁금하신 분은 당 사이트의 흔한에러 코너의 “부흥강사 사례비는 장물이다”라는 글을 읽어 보십시요. 바보들의 이야기 코너에 “바울의 양심” 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 보세요. 성경에서 확인됩니다.

박목사는 “본이 되는 교회”에 대해 세 가지 특징을 말했다.

첫째 교회는 가정공동체가 되어야한다고 박목사는 주장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22장 1-2에 기록된 도망중인 다윗이 굴속으로 피신한 사건을 박목사는 근거로 삼는다. 다윗이 들어간 아둘람 굴에 모여든 부모형제라는 말에서 “가정”을 이끌어 낸다. 억지춘향 해도 너무한다는 필자의 생각이다. 굴은 교회요, 다윗은 예수님이라는 상황 인식은 주일학교 2학년 학생의 성경읽기 딱 그것이다. 여보세요 박목사, 교회의 근원은 예루살렘 성전이고 그 성전이 허물어져, 그리고 흩어진 유대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 기능의 일부를 취하여 세운 것이 시나고그(synagogue, 유대인회당)이고 그것이 신약의 church(교회)라는 것쯤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도 다 알아요, 어찌 교인 1000명을 넘는 교회 목사가 겨우 이것밖에는,,, 이러고도 급료를 받으니,,,,,,

그리고 그 예루살렘 성전도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이고 다윗이 아직 도망 다니는 처지 그러니까 아직 왕이 안되었는데 박목사가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는지 필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면서 가족에 관한 단어가 들어간 성경구절 죄다 끌어모은다. 그 구절 하나 하나가 어지간한 신학대학 박사학위 논문을 쓸 정도의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하염없이 단발성 인용만을 일삼는다.

필자가, 에덴 동산을 박목사의 사고구조로 다시한번 각색하면,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살던 에덴 동산은 교회이고 두사람은 성도이고, 그럼 그 교회의 목사는 뱀이다, 왜 필자라고 이러한 막무가내 비유를 상상하면 아니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그런데 어라, 박목사처럼 억지주장의 예를 든다는 게,, 참 필자의 비유가 오늘날의 교회와 실제로 비슷하네요. 목사들이 순진한 성도들을 이상한 방향으로 꾀어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제 박목사는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교도소 수형자를 아들로 둔 어느 여자 성도가 쥐여준 드롶푸스 사탕을 빌미로 예수사랑을 박목사는 말했다. 박목사 자신이 목회중 어려웠을 때, 찌들린 삶을 살았던 성도가 준 그 사탕을 생각하며 눈물지었다고 말할 때는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인격의, 드롶푸스 사탕 한 개에 눈물짓던 박목사님, 집도 가깝고 교회도 가깝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수있었는데 그리하여 교회돈을 아껴 그렇게 어려운 분 한분이라도 더 도와줄 수 있었는데, 오늘 어디서 주무시고 짐싸갖고 나왔다고요? 드롶푸스 사랑 – 완벽한 위선의 말이다. 더 골 때리는 것은, 아멘약 약기운이 아직 강성하여 아직도 과다복용증세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반응이다.

그리고 박목사는, 교도소에 수감된 택시강도의 예화를 들었는데, 교회로부터의 선교 구제 대상을 가해자 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같힌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끌어 내어 자신들의 사역을 정당화하려 시도하는 경우를 필자는 수도 없이 봐왔는데, 실제로 최대의 피해자는 그래서 당연히 위로의 대상자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먼저이다. 그런데 희얀하게 가해자들만이 득실거리는 교도소는 허벌나게 가면서 피해자를 위해서는 단 한마디 기도도 없는 것이 필자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예수사랑의 불편한 진실”이다. 그만큼 박목사는 생각이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피해자의 가족이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은 “박목사 자신의 교도소사역”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속담에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말이 있다.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박목사와 같은 이런 사람들이 말리는 시누이이다.

자신이 오늘 아침 호텔에서 자고 나온 것에 대해 아무런 미안한 마음 조차 없는 박목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교도소사역) 돌아 볼뿐 남들의 입장은 말은 고려한다고 하지만, 이 설교의 전체에서 박목사의 말이 상충하기 때문에 그 말 조차 거짓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필자는 이글 서두에 이설교는 “가짜” 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두번째로 교회는 피난처, 다윗이 도망중에 몸을 피한곳 그래서 피_난_처(한글자씩 또바또박 아주 느리게 발음했음)라고 박목사는 피난처라는 낱말에 관한 국어 사전의 설명을 청중에게 읽어주고 있다.

교회오는 사람은 환란당한자, 빚진자, 마음이 상한자 원통한자들이다, 그래서 위로가 넘치고 치유가 넘쳐야 한다, 예수를 믿고나서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된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다 이런 말을 박목사는 계속 이어갔다. 박목사는 청중을 가리켜, 직업이 없거나 기울어지는 자영업자들도 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이 대 채워주신다라고 빌립보서를 들먹이어 그러쟎아도 호텔껀 때문에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느끼함의 목소리를 한껏 더 높인다. 사도 바울이 하늘에서 통곡을 하긋다.

박목사는, 박수무당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을 연상시키는 이런 말을 했다. “자다가 내백성을 위로하라 – 이 말이 입에서 튀어 나오면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가증의 극치를 보고있다. 바로 자신이 그 위로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박목사는 전혀 모르고 있다.

절름발이 소년이 멀쩡한 강아지와 절름발이 강아지사이에서 절름발이 강아지를 취했다는 그의 예화는 너무나 소녀적 감상에 호소하는, 그리하여 박목사는 거의 울먹인다. 그러나, 박목사는 이런 말을 할 때는 대단히 조심했어야 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 필자가 다시한번 박목사의 뒤틀린 사고구조에 대해 상세히 이 글 하단 “박목사의 생각이 왜 천박한가?” 라는 소제목하에 기술하겠다. 이런 “말과 행동”을 박목사는 함부로 하지마라. 청중가운데 그런 사람이 앉아 있다면 당신 어떻게 할래? 그 사람들은 이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왜 그들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가, 그러한 사건이 눈에 이상하게 들어오는 박 목사의 마음밭이 예사롭지 않다.

태생적으로 눈이 하나인 사람들만 사는 나라에, 필자 같이 두개의 눈을 가진사람이 가면, 필자가 disable이다. 청중가운데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거나, 그러한 자녀를 둔 성도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러고도 위로가 어쩌고 저쩌고 하니 참 기만 막힐 뿐.

마지막 세번째 본이 되는 교회 한몸공동체라고 박목사는 말한다. 역시 성경 구절 열심히 인용하고 그 특유의 느끼한 음성으로 청중에게 어필하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번짓수가 틀렸다. 교회와 나사이에는 장벽이 없어야한다는 박목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박목사 같은 사람이 장벽이된다. 그가 목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일반 성도라면 바울이 권면한 대로 멀리할(stay away) 대상일 뿐 장벽은 아니건만.

교회는 이러이러 해야한다, 성경구절 성경구절 성경구절, 교회는 저러저러해야 한다, 성경구절 성경구절 성경구절,,,,,,, 박목사로부터 성서해석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꼭대기에 물고기를 구하려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저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꼭 알맞는 성경구절만 읊어 대면 그것이 설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박목사는 그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필자는,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고 그 예배함의 정점에 “말씀” 즉 메세지가 선포되는 곳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박목사는 교회를 무슨 카운슬러, 정신과 의사, 회사의 고충처리실, 은행, 사교클럽 이런 것들쯤으로 오늘 설교에서 왜곡해 버린다. 성서 해석은 단 한군데에서도 찾아 볼수가 없다. 성서해석이란, 느헤미야가 말한대로 하나님 말씀을 청중으로 하여금 밝히 깨달아 알게 하는 행위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내 뱉고 그에 상응하는 성경구절 줏어섬기고 하는 것은 내가 성경 구절을 이렇게 많이 알고 있소 하고 자랑하는 행위밖에는 아니된다.

목사는, 일반 성도인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일하여 돈 버는 동안, 열심히 책을 읽고 기도함으로서 다음 주일 설교 한편을 하는 준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박목사의 설교를 듣다보면, 어지간한 신학서적 한권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한 사람 같지 않아 보인다. 교회로 부터 돈은 엄청 받으면서 거의 무위도식하고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자꾸 필자에게 엄습해온다.

또 말하지만, 인간이 인간의 이야기를 하면서 성경구절을 죄다 끌어 모아 구색을 마추는 일, 인간이 하나님 이야기 그자체를 해석하는 일, 이 둘은 너무나 다른 패러다임이다.

박목사의 생각이 왜 천박한가?

박목사는, 신체의 특성이 다수의 사람과 다른 소수의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해야 한다”라는 마음 바탕을 가진 사람이다. 실제로 절룩이는 시늉을 해보임으로서 청중을 향해 “보시요 이런 모습을, 얼마나 안쓰러웁니까” 호소하고 있다. 물론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동병상련의 위로를 전하자라는 내용이 먼저이지만 그가 든 예화는 그 본래의 의도를 까맣게 잊게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절름발이 강아지를 취한다. 이 이야기의 바탕에는 절름발이는 “잘 못이다” 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두다리가 멀쩡한 사람하고 한쪽 다리를 저는 사람하고 이미 비교를 끝내버리고 다리를 저는 사람은 잘못이라는 전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아픈 사람이 절름발이 강아지를 알아봤다는 논리는, 두다리는 자기들처럼 멀쩡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일 뿐이다. 박목사 자신은 그들이 처한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말로 “he has to be placed”. 박목사의 그런 말에 대해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So What?”

필자는 실제로 경험했다. 어떤 빌딩에 문을 열고 들어 가려하는데 보조보행기를 밀고 이미 문에 들어 서 있던 분이 다음 문을 열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었다. 필자는 시간이 급했다. 그 분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어물거리다가 시간이 급한 필자가 먼저 문을 열어 젖혔을 때, 이분은 기분이 몹시 상한 눈치에 “thank you”를 말하지 않았다. 필자는 끝까지 그가 다 통과할 때까지 기다렸어야만 했었다.

자기를 그런 식으로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 – 바로 박목사의 시각 – 이 필자가 말하는 천박한 사고 방식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의 눈에는 나면서 잘 못 된 사람에 대해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이시려고 그런 것이다” 라면서 예수는 “no, it is not your business but God” 응수하신다. 박목사는 이러한 성경구절을 주일학교 때 배운 그 수준을 못 벗어난 채 그저 줏어섬기기는 신앙의 젖비린내를 풍기기는 해도, 그 말의 참뜻울 구하기에는 그의 뇌세포가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늙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부장로교회-박헌승목사-설교비평-본이 되는 교회”에 대한 2개의 댓글

  1. vccc.ca 에 가서  설교(?) 구경 잘 했읍니다.

    그런데 그 교회   한 XX  목사가 일하는 곳 아닙니까 ? 

    (홈 page 에 가니까  지교회처럼 사진 도배 했던데 , 예수 사진 한개라도  발라놓지)

    한 십년전에는 말씀을 해석하는 힘이 있다고 들었는데, 

    교회가 커지고 힘깨나 쓰는 줄 착각 하더니만 , 결국 유유상종 하는 꼴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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