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장로교회-박헌승목사-설교비평-복음을 전하는 삶이란?

(먼저 미시사가 서부장로교회 웹사이트의동영상은 타교회에 비해서 음성이 아주 약하게 녹음이 되서 그런지 컴퓨터 볼륨 스피커볼륨을 최대화를 했음에도 겨우 알아 들을수 있는 정도밖에는 안되어서 설교듣기에 타교회에 비해 조금 더 불편했다.)

오늘은 미시사가 서부장로교회의 박헌승목사(이하 박목사)의 “복음을 전하는 삶”이라는 제목의 1월 26일자 설교를 해당교회 웹에서 듣고 비평문을 써보려한다.

인류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버린 한권의 책이라면, 그것은 단연 로마서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실제로, 마틴 루터 카톨릭 신부가 로마서를 읽고, 95개의 질문서를 교회당에 내걸면서 종교개혁을 일으켜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켰다는 것은 굳이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렇게 저렇게 들어 알고 있다.

또한, 근대의 저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도 스위스 조그만 산간교회에서 시작한 로마서 강해로 말미암아 신학자의 스타덤에 올랐다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로마서의 주제 중의 주제인 1장 16-17절중에서 한절인 16절과 그 앞 절인 15절 말씀이 오늘 설교의 본문말씀이다. 그러니까 박목사는 로마서 주제의 반만 본문으로 뽑은 셈이다.

로마서 1장 15-16절 :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나는 박목사의 설교를 수년전에 한번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나의 느낌은, 성경구절 인용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말 한마디 하고 그에 대한 증빙으로 성경구절 하나 암송 읽고, 아니면 박목사가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있으면 먼저 그 상황 혹은 자기가 표현하려는 뜻에 해당되는 성경구절을 먼저 암송하여 청중으로 하여금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기록된 것이니 다른 이유없다, 절대이다” 라는 인상을 주어 자신의 주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었다.

그런들 누가 뭐라하리요, 설교의 내용이 올바른 성경해석 작용에 의한 것이라면, 그런데 들어보면, 결국은 모처럼 찾아간 친정에서 친정어머니한테 실컷 욕만 얻어먹고 다시 시집으로 향하는 시집살이 호되게하는 어떤 며느리 심정이랄까?

왜 교회에 가서 “당신은 죄인이다, 예수가 당신을 구원했다, 그러니 당신은 그 복음을 전해야한다, 전해야한다 전해야한다,,, on and on” 이런 말만 계속 들어야 하나, 과연 성도는 꾸짖음 대상 밖에는 안되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내가 왜 시간 없애면서 이런 설교를 듣고 이런 글을 써야하나 회의도 들었지만, 오직 한가지, 지금은 모든 목사들의 upgrade가 필요한 시대이고, 그런일이 빨리 일어나가기 위해서는 평신도가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분명히 알자, 예수옆에는 항상 찌그러지고 병들고 약한 사람들이 있었지, 포마드 반질거리는 헤어스타일에, 양복(성경에는 자주색옷으로 표현되어있다) 잘빼입은 사람들이, 저자거리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들, 바로 바리새인이 아니었음을.

박 목사 설교 후반부에, 참고 참으면서 들으면서, “예수가 뭘 잘못 했기에 하체까지 다 드러내놓은 상태로 수치를 당해야 하느냐”라는 부분에서 언성을 높일 때, 나는 참담했다. 언성을 높여야할 타이밍이 별로 아닌것 같은데, 이미 우리는 예수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누구도 부인하는 사람이없는데 그래서 참담했다.

초반 약 10여분간에 걸쳐, 오늘의 메인 토픽이 “복음을 전하는 삶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기위해서 그는 세가지의 하부 항목이 있다는 것을 말했다. 그 세가지란,

1.복음을 위하여 존재하는 삶
2.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
3.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

보시다시피, “복음”이 오늘설교의 키워드이지 않은가. 그러나 놀랍게도, 그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단 한마디, 유앙겔리온 기쁜소식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예수를 보내셨다는 소식 정도의 소개 말만 있었다는 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서부장로교회 교인들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다고 가정하셔서 그런지 그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언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내가 아는 오늘 본문의 “복음”이란, 그렇게 단순히 “예수께서 돌아가셔서 우리가 구원 받았다”라는, 그리하여 초등부 주일 학교교사의 공과공부시간에나 어울릴 듯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간단한 화두가 아니다. 그래서 박목사도 위에서 보듯이 세가지 sub topic들을 marquee로 내걸지 않았는가.

박목사가 초반에 아주 잠간 언급했듯이, 바울은 로마에 그렇게 가고 싶었다. 세계를 변화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웅대한 꿈의 소유자였던 바울은 예수를 전하는데 있어서는 당대의 뉴욕이었던 로마에 가는 것은 너무도 당여한 일이었고, 궁극으로는 당시에 지구는 가만이 있고 태양이 돈다는 생각을 갖은 사람들에게는 땅 끝이었던 스페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시작하면서, 첫번째로 뱃길에 올랐던 실루기아, 그 바닷가에서 배에 올랐을 때, 그의 감회가 어떠 했을까. 인류의 역사는 이미 그때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다고 보면, 너무 기독교사관에 의한 나만의 역사인식인가?

내가 아는 로마서가 쓰여진 당시의 배경을 필자가 말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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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가 쓰여지던 당시의 세상은, 로마 황제의 소유물이었다. 심지어 그를 황제는 물론 신으로 추앙하도록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던 모양이다. 그의 군대 혹은 꼭둑각시들인 괴뢰정부관료들의 세금수탈 군대징발 노역징발에 일반 민초들은 녹아났을 것이다. 하물며 정복자 로마군단의 군화발에 철병거에 초토화된 피정복지 민초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짐작이 간다.

그 와중에 피정복지 중의 한 곳인 팔레스타인 한쪽 구석에서, 그들의 눈에는 거의 정신나간 것으로 비쳐졌을, 어떤 사람이 내가 신이다 라고 떠들다가 십자가에 간단히 매달려 죽었다. 바울은, 이 일이 단순한 사형집행이 아니었음을 깨달아 그가 메시아임을 알았고, 자기의 인생 전체를 건다. 그리고 그가 “내 삶의 주” 하나님이다 메시아다라고 외친다.

1절에 단순히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쓰여 있으나, 이것은 세상을 뒤집으려는 바울의 엄청난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황제숭배사상 아래서 살아가던 일반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란(복음 이란), 황제가 세금 감면해준다, 군대 대징발없다, 노역징발 없다, 등등 이런 소식이, 로마황실로부터 나오는 이런 소식이 그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 깍는다는 데는 싫어할 사람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로마시대의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복음 기쁜 소식이었다. 철저히 황제 중심의 사고 방식이다.

그런데, 바울이 팔레스타인의 한 정신나간 사형수가 자기의 주인(1절에 자기가 예수의 “종”이라고 언급한다)이고 그가 바로 복음이라고 고백한다. 이말을 듣는 로마시민의 얼굴을 상상해보자. 그저 쓴웃음도 안 나올 것이다.

오늘날, 여호와 증인이라는 사람들이 집을 방문하는 경우에, 우리 기독교도들의 마음 자세를, 그들에게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것이다.

성경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다. 왜냐 우리는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모든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로마황제로 부터 나오는, 즉 세상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 지금까지의 “복음”이란 말의 정의였었다면, 이제는 생각을 바꿔 하늘 아버지로 부터 온 복음이 참된 복음이라는 것을 말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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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박목사는 아주 짧게 2-3초동안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복음이다, 예수를 보내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이 복음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각론으로 들어간다.

1.복음을 위하여 존재하는 삶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위와같은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를 복음의 통로로 살게 하려고 하신다, 성공과 건강한 사람이 그럼에도 허전한 이유는 존재의 가치를 잃은 경우이다, 등등과 같은 말을 댓귀법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이러이러 하다 말하고 이에 대한 댓구로 어느 성경 어느 장 어느 절에서는 이러이러하게 쓰여있다라고 말한다. 박목사는 확실히 주일학교시절 요절말씀 암송대회에서 1등을 했을 정도의 탁월한 암송능력을 보여주었다. 그 것도 적재적소에,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에.

예화로서는, 권사님의 회갑잔치를 들었고, 권사님이 늙으막에 삶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가치있는 이유를 찾기위해 의과 대학에가서 시신 기증을 약속했다고 전한다. 권사님은 그때부터 행복이 찾아 왔다, 그래서 운동, 식사, 치아건강, 피부관리 등에 더욱 노력하여, 죽어서도 쓰여질 것이라는 기대때문에 삶의 의욕이 넘쳤다 한다. 이런 예에서 보는 것처럼 가치있는 일을 할 때 사람은 존재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일을 해도 행복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쓰기 때문이다. 그렇게해서 결국은 복음 전하는 일이고 그로하여금 우리가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일이다.

고전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행20:24 바울의 행복선언문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것이 행복한것 아니냐? 복음 전하고 싶은 마음은 나는 복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누가복음 4:43절에서 예수는 다른 동네에서도 복음을 전해야한다고 했다. 어떤 직업을 가졌던지 직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한다. 어떤 기도회에 가서 기도하던 중에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것을 예로 들어, 마태 21:3 나귀새끼도 “주가 쓰시겠다” 스가랴 9:9 나귀의 새끼 나귀 새끼도 하나님도 택정했는데,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겠는가,,,,,,

박목사는 끊임없는 관련 성경 구절을 암송한다. 한구절 암송 끝나면, 성공을 따라 살지 말고 목적을 따라 살아라 행복을 따라 살지 말고 목적을 따라 살아라 목적을추구하면 성경도 따라오고 행복도 따라올줄로 믿는다 권면이 따라나온다 등등의 댓절이 이어 나온다.

박목사의 그러한 성경구절 암송과 권면이 나쁜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성경해석은 어디 있는가? 나는 이점을 주목한다. 나는 박목사가, 스스로 정한 본문 말씀 즉 성경 텍스트에 얼마나 충실한가, 이점을 주목한다.

박목사 스스로 말했듯이 목적을 따라 설교를 해야함이 옳지 않은가? 목적을 상실한 설교는 이처럼, 좋은 말만 이리 갖다 붙이고 저리 같다 붙이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단히 성서 중심의 설교를 나는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든 듯이 보였다. 박목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할때는 얼굴이 화끈거리기까지 했다.

“왜 내 생활에 이전저런 환란이 오는가? 아픔은 왜생기는가? 기도도 하고 예배도 열심히 나오는데 왜그럴까요? 복음을 전하지 않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질문을 박목사에 하고 싶다.

오늘 저녁 자궁암 수술하러 입원하시는 어떤 교회 목사 사모님도 그래서 아픈가요?

엊그제 대장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장로님도 그래서 그랬나요?

우리교회 집사님 주식 종목 잘 택해서 떼돈 벌어 헌금 많이 했는데, 복음을 열심히 전한 결과인가요?

신호등 기다리고 정지선에서 기다리던중 뒷차가 내차를 들이 받아 목이 아파 기브스를 하는 바람에 오늘 저녁 특송을 못해서 괴로운데, 그래서그랬나요?

신실하신 어느교회 목사님께서 그 교회 실세 장로인 악덕포주 앞에서 “포주 그만하라” 설교했다하여 추방당해 겪는 당장의 생계의 괴로움도, 복음 전하지 않아서 그런가요?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박목사는 아마 이 성경 구절(고전9:16)을 들어 위의 질문들에 대답할 것으로 짐작된다. 글자 그대로 내게 화가 있다하지 않는가? 이글을 읽으시는 분중에 신학, 특히 고린도서로 학위 받으신분 계시면, 설명좀 해주세요.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고린도전서 9장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박목사의 9장 16절 인용은 평신도인 우리에게 그리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예수의 오리지날 제자들로부터 요즘말로 왕따를 당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즉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부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1절이하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1절.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절.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절.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4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이런 상황에 빠진 바울이, 자기 스스로 자기의 job에 대한 마음 자세를 써놓은 것임을, 굳이 휘황찬란한 신학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두번만 읽어보면 알수가 있다. 더우기 영어로 읽어보자.

16절 :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한글로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라고 번역되었다. 영어버젼에서는, preach해야하고 그것은 자랑해서는 아니되고, 내가(바울 자신이) reach 안 하면 miserable한 일이 내게(바울 자신에게) 생긴다는 뜻이 아닌가?

넓게 보면, 우리가 비기독교도에게 전하는 말 자체가 preach행위가 될 수는 있을 지언정, 평신도인 우리가 그런 일 즉 복음을 전하는 일가지고 preach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즉, 좁게보면, 이것은 바울이 사도로서의 자기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표현중의 하나인 것이다. 박목사의 그런 식의 성경구절 들이대기라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고 단번에 죽으셨는데, 왜 세례가 필요합니까”라는 질문에 할 말이 궁색해진다. 우리 죄를 사했는데 왜 또 매일 회개 해야합니까, 아마 답이 없을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놀라운 것은 7절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필자가 아는 바울의 직업은 천막업자였다. 천하의 바울이 천막업자였다. 당대의 석학이 천막업자였다. 교인들에게 빚지기 싫어서, 예수때문에 핍박당하는 교인들에게 빌붙기 싫어서, 그들의 빵 한조각도 축내기 싫어서 자기 손수 천막을 지어 파는 천막업자였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쯤 되면, 등따습고 배부른 목사들은 꼬리를 내릴 법도 한데,,,,,

박목사는 재차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어려움은 100퍼센트가 복음을 전하지 않기때문이며, 이것을 깨닫게 하기위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면 주님이 모든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것을 믿는다.” 이런 말이 주일 낮 대예배 설교시간에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필자는 이해할 수 없다.

박목사의 성경 구절 암송은 게속된다.

롬: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마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나는 분명하게 밝혀둔다. 박목사의 궁극적 요점인 “복음 전함”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옳다는 견해이다. 그러면서도, 첫번째 sub title “복음을 위해 존재하는 삶”이라는 것이, 넓게 보면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평신도에게 모두 해당하는 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하던 가게 다 때려 치고 모든 사람들이 복음전하겠다고 선교간다면, 박목사의 생계는 누가 책임지나?

분명한 것은 박목사는 복음 전하는 일로 교회로부터 돈을 받는다. 그 돈으로 집도 샀을 것이고 자녀들 학자금도 주었을 것이다. 교회에서는 노후를 위해 연금도 들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쓰린 가슴안고 교회에 가서 소리없이 숨죽이는 그 가녀린 손끝으로 정성을 다한 그 손길은 정작 미래가 없다는 것을(자영업하면서 연금드신 분들 거의 없으실거요, 불법체류로 암흑의 삶을 사는 가족) 뼈를 깍는 고통으로 바라보야만 한다.

박목사가, “예수가 뭐를 잘못했길래 죽였느냐” 강변했다. 박목사는 우리들 평신도가 뭐를 그리 잘못했기에 복음 전하지 않는다고 꾸중만 하는가?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비록 부족하나, 이 척박한 이민의 삶에서, 그래도 의지할 곳이라곤 교회밖에 없어 상한 마음으로 머리 숙인 평신도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박목사의 논법대로라면

“그러는 박목사 당신은, 빌(bill)은 싸여만 가고, 애들이 지난학기 돈 안내서 다음학기 학교에 등록이 안되고, 나는 병원에 가야 되는 지경에 있어 보셨습니까?”

백번을 양보해 “박목사를 포함한 우리들” 전체를 향한 메세지라 하더라도, 어디에도 꾸지람만, 자책만 있을 뿐 당신의 설교에는 위로는 없었다.

2.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

박목사의 성경인용과 관련된 간단한 예화내지는 인용된 성경구절의 연결하는 말이 계속된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목적따라 살지 않음을 부끄러워해야지 왜복음을 부끄러워하는가,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두 영광스럽게 했다, 역사적인 실례로 무디 빌리그레이엄이다. 부러움을 받는 인생보다 존경받는 인생이 되라 빌케이츠 타이거우즈는 부러움의 삶이지만, 빌리 목사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존경받는 삶이다.”

“눅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성경책들고다니는 것 부끄러워 하지 마라, 식당에서 밥먹는데 기도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마라. 그게 어떻게 기독교인이냐…..”

여기에서도, 박목사의 닫힌 마음을 본다. 자기의 신앙방법이 전적으로 옳다, 그리하여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스스로 분리해버리는, 이름하여 소외시켜 버리는, 우를 범한다. 성경말씀 어디에 밥 먹을 때 반드시 기도하라고 쓰여있는가. 내가 성경책 들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운 이유는, 일 주일 내내 한번도 읽지 않는 성경을 왜 꼭 주일날만 들고 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애지중지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게 하는가 그래서, 양심상 안들고 다닌다. 그리고 교회 가면, 다 projector 로 다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설교는 또 성경구절 인용으로 계속된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드러내 놓고서고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신 이유는 복음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부끄러워 한다. 아내를 부끄러워 하는 남편에게 행복이 없다. 자식을 부끄러워 하는 부모에게 행복이업다. 자식이 부모를 부끄러워한다. 쓰레기치우는 아버지를, 길가에서 친구와 함께 있던 영구가 외면한다…… “

“예수를 왜 그리 부끄러워해야하는가 ? 나는 젊은시절 코스모스 전도단에서 나발수로 전도했다. 명동, 이대앞, 영등포에서 했다. 부끄러워 하지마라, 그런 식으로만 해야하는것이 전도냐 말하는 사람은, 당신은 그러면 전도해 봤냐? 이렇게까지 청중들에게 되묻는다. 이런 말을 목사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가?

전도, 그냥 한번 해보는 것이다……”

끝도 없이 청중들을 몰아세운다. 또 성경 구절 암송한다.

딤전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살전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롬15: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딤전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딤전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3.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

롬1: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의 능력은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 나타난다.

살전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어떤 선교사가 있었다. 오랙동안 기도만 했는데 구원의 열매가 없었다. 3년동안 학교도 세워보고 했는데도 예수믿는 사람이 안생겼다, 홧김에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라고 기도하고 나오다가 다리가 몽땅 부러졌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라고했더니 응답하셨다, 그래서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기뻤다. 응급차에서는 물론 병원에서 찬송하고 하니, 그 것을 보고 두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3년만에 두사람이 믿게된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런 간증은 실제 사실이라 하더라도, 평신도들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다. 병신도들한테나 가능한 얘기이다. (서부장로교회 교우님들께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에 대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오해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롬 15: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막9: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처럼, 박목사는 45분 설교시간 대부분을, 매일의 삶을 체바퀴처럼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우리 보통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께 죄송해 하는 부분을 한마디로 끄집어 말하고, 곧 이어서 그 것에 알맞는 성경말씀을 “복음”자가 들어간 성경구절들을 들이 대서, 그것도 아주 호소력이 있음직한 톤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더없는 죄책감에 젖어 들게했다.

박목사의 오늘 설교는, 성서텍스트의 충실한 해석과, 평신도와는 사뭇 달라야 할 목사로서의 혜안을 통한 하나님의 메세지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평신도 때리기에 급급한, 설교가 아닌 교훈내지는 전도를 위한 사전 마음자세 확립을 위한 기초단계 강의 정도였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평신도는 맞아도 쌀 만큼 죄많은 사람들임을 또 한번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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