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장로교회-박헌승목사-설교비평-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이번 설교비평은 서부장로교회 박헌승 목사(이하 박목사) 가 2월 8일에 행한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라는 제목의 설교를 대상으로 한다. 지난번 비평에서 좀 혹독한 평가를 했다는 생각이 필자를 은근히 짓눌렀기에, 지난번은 설교 선택상 불운(?)했다고 치고 이번에는 좋겠지하는 마음으로 이설교를 택했다.

오늘의 설교는 우리도 잘알고 있는 로마백부장과 하인과 예수의 치유하심에 관한 마태의 복음서 8장 5절 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박목사는 정했다. 필자는, 이 본문과 대응되는 말씀이 누가의 복음서 7장에도 기술 되어 있는데, 누가가 더 정교하게 상황을 기술하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포함한 복음서 마태, 누가의 복음서가 쓰여진 시기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박목사는 설명이 없다. 설교전체를 통해, 박목사는 백부장의 믿음만을 말할 뿐이었다. 이말만을 놓고 보면 얄팍한 성경 읽기라고 해도 별 할말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믿음의 “믿”자가 들어간 그럴듯한 성경구절을 박목사는 여지없이 죄다 끌어모은다.

전체 설교시간, 약 40분 25초의 러닝타임을 필자의 동영상 플레이어는 보여준다. 그 중 초반 약 7분 20초에 걸쳐 서부장로교회의 시리아 선교에 대한 장황한 박목사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하면서, 거기서 있었던 기적인 어린아이가 일어나 걸었던 치유의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그 중에 선교의 비젼을 말하던중 1884년에 한국땅에 선교사 들어온 이후 20년만에 장대현 교회에 대역사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우리민족이 믿음을 지켜냈다고 그는 말했다. 교회가 신사에 참배하여 교회당 안에서 예배시간 중에 서울 남산의 신사를 향하여 먼저 고개를 숙여 묵도했던 신사참배는 쏙 빼놓고 잘한 것만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박목사는 “긍정의 힘”의 확실한 소유자이다.

박목사는 “치유”라는 단어를 빌미로 이사야서 53장 “그가 찔림은……” 성경구절을 예수로 인해 고침을 받아야한다고 매우 호소력이 짙은 목소리로 두번을 낭송한다. 그러면서, 손(송)장로의 집회가 터론토에 복음과 치유의 집회가 될것이라고 (필자가 짐작하기에) 선전한다. 예수가 고침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고 베드로서의 “그가 채찍에 맞…”를 박목사는 성우를 능가하는 톤으로 낭송한다.

박목사는, 설교 시작 8분20초가 지난 후에 비로서 오늘의 본문인 마태복음 8장에 진입한다. 설교시간의 20%가 넘는 시간에 한 이야기는, 선교이야기 관련성경구절 낭송이 전부였다. 그 성경 구절이라는 것도 교회를 몇년 다닌 사람들은 다 아는 평범한 내용이거나 주일학교 학생 상대의 이야기설명 수준정도에 그냥 감성적인 목소리로 읽어 청중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고등학교 소녀적인 감성만을 자극하는 것 그 이상이 아니었다.

필자가 발견한 박목사의 설교 패턴을 기술한다.

1) 본문말씀을 정한다.
2) 거기에서 키워드를 한두개를 뽑아낸다.

3) 그 키워드가 들어있는 모든 성경구절을 노트에 적거나 혹은 이미 머리속에 암기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4) 자기의 주장 내지는 어떤 상황을 말한다.
5) 3)에서 적어 놓은(혹은 암기된) 성경구절 한개 내지는 두개을 낭송한다.
6) 4)와 5)를 번갈아 계속적으로 반복한다.
7) 설교를 끝낸다

오늘 설교역시 이러한 패턴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았다.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백부장의 하인 치유이야기에서 단순히 백부장이 하인을 사랑하여 예수께 의탁한 믿음만을 강조한다면, 감동의 크기에 있어서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 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었을 텐데.

필자가 보건대, 박목사는 성경구절은 많이 인용하는데 각 구절의 “해석” 즉 성서기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꿰뚫지는 못하더라도 개연성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다음은 박목사의 이야기가 아니고 필자의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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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백부장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기술한 내용이 약간 다르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백부장은 이미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들에게 회당을 지어주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누가나 마태 복음이 쓰여진 시기는 60년대 네로황제의 박해와 예수가 예언한 예루살렘성전파괴가 2차 유대인 봉기의 진압과정에서 이미 완수된 시대 내지는 이후라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즉, 백부장은 예수 살아있을 때 사람이고, 그 이야기를 기록한 시점은 예수사후 40-50년후가 된다. 그리고 복음서는 아시다시피 그리스말로(헬라말)로 쓰여졌다. 즉 타겟 독자가 native 유대인이 주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예수운동이 즉 교회가, 예수를 옆에서 보고 만졌던 사도들과 목격자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는 마당에서, 마태 마가 누가를 따르던 공동체들이, 제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와 이방인을 향해 기록으로 남겨두기위한 예수사건들 중 하나라는 말이다.

백부장의 이야기가 기록되던 당시는 유대와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 초토화되어 버린 절망의 시기였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로마의 백부장이다. 이야기속의 로마군인이 자기 가족이 아니라 하인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예수께 의탁했다는 사실이, 백부장의 믿음만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 백부장의 태도를 보라.

“나도 남의 부하이고 또한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 예수가 병을 잘 고치는데 그렇다고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이 모양이 좋지 않게 보인다, 그러니 예수여 말씀만 하시고 우리집에는 안가는 것이 어떠겠냐, 보는 눈도 있고해서……”

이것이 백부장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로들을 먼저 예수께 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엔 예수의 입장에 서보자.

“로마백부장이 내 능력을 믿긴 믿는데 보는 사람도 있고 하니, 조용히 하인 병만 좀 고쳐달라고 얍삭하게 하는구나, 그런데 껄끄러움을 감수하면서까지도 내게 그런 부탁을, 그것도 친척도 아니고 하잘것없는 종이 병걸렸기로서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예수는 그러나, 백부장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시고 비로서 네 믿음이 좋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재미없다. 복음서가 쓰여지던 시절 이제 막 자라나는 교회에, 당시의 점령군이자 지배계급인 로마군인과 예수의 만남은 너무도 극적이지 않은가?

유대인들에게 회당을 지어 준 로마군인, 이것을 교회를 지어준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교회는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박해가운데 피를 뿌리며 끈질기게 피어나는 광야의 한송이 들꽃처럼, 예수가 내린 명령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했던 초대교회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죽음앞에서조차 의연했던 진정성으로 부터 로마군인도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명백히 하려는 목적으로 오늘 본문의 기사를 썼다는 것이 필자가 해보는 생각중의 하나이다.

단순히 “로마”군인으로만 보는 것도 좋지만, 엄격한 검열(cesnsorship)을 피하여 예수복음이 로마의 심장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기록한 기자의 지혜로움에 필자는 감탄한다.

즉 필자의 생각은, 로마백부장의 믿음만을 강조한다면, 치유만을 강조한다면, 복음서기자는 더 충격적인 기사를 하나라도 더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왜 충격의 강도가 덜한 내용을 기술해야만 했을까?

박목사는 적어도 이런 내용을 설교에 실었어야 했다. 꼭 필자의 생각과 같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차곡차곡 찾아 들어가는 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설교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성서기자의 세계로(결국 하나님의 세계로) 청중을 끌고 들어가야 한다. 박목사가 지금 처럼 성경말씀이나 여기저기 끌어다가 그럴 듯한 톤으로 웅변학원 수강생처럼 낭송이나 하는 것은 결코 성서 텍스트 해석에 기반한 설교라고 할수 없다. 그것은, 철없을 때 주일학교에서 숙제로 내주었던 요절말씀 암송하여 주일학교 선생님이 확인한 후 장부에 작대기 하나 그었던 그 수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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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박목사의 설교는 계속된다.

박목사는 계속되는 설교에서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박목사의 설교 패턴”의 공식에 따라 성경 한구절 끌어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읽고 자신의 말 한마디하고 또 성경말씀 끌어오고 on and on and on…… 처음에는 치유이야기로 시작해서 치유는 믿음에서 나온다는데 까지 16분을 소비하고 오늘의 메인 키워드 믿음으로 화제가 넘어가 간다. 이번에는 온갖 믿음관련 성경구절을 동원한다.믿은대로 될지어다,, 그리고 호소력짙은 목소리로 낭송한다.

박목사의 오늘 설교 역시, 성서텍스트 해석은 어디에도 없는 그리하여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청중들이 이미 알고 있는 성경구절을 낭송하여 청중들의 감성에만 호소할 수 밖에 없는 박목사의 한계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여자고등학교 학예회 시낭송 강당에 앉아 있는 기분이랄까.

박목사는, 성경의 위대한 믿음을 다 끄집어내서 최상을 설정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구절들을 읽는다,그 때 청중은 알고 있는 것을 담임 목사가 다시한번 터치함으로서 박목사가 설정한 “최상”그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결국 죄책감만이 자신들에게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설교로 “은혜가 되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도 계시리라. 필자는 그 의견에 부정하지 않는다. 긍정은 더욱 아니다. 옛날 목사들은, 정보 접근의 한계 떄문에 선진 신학의 서적과 학문을 닦을 기회를 갖지 못했음을 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의 목사들이 어찌 그들과 같을 수 있단 말인가. 4-50년전 시골 교회 부흥회강사 정도의 설교가 오늘날 통할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것이다.

박목사가 “믿음이 중요하다” 이런 말에 목소리 낮춰 상대적으로 느리게 감성적으로 말하는 것은, 청중 알기를 이제 교회에 나온지 2-3주 지난 사람들로 착각하고 있거나, 박목사 스스로가 주일학교 1-2학년 교사의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일 가능성도 있다.”믿음이 중요하다” – 그렇게 중요한 “믿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왜 설명을 안하시나요?

필자는, 북한산 입구 세검정 고개 조금 올라가면 삼각산 골짜기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계곡에서 장박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을 본일이 있다.

필자가 들은 그들의 기도는 이런 것도 있었다. “믿으면 태산도 움직인다고 하신 주여, 이 북한산을 옮겨 인천앞바다를 채우게 하소서” 엄동설한에 담요한장 걸치고 필사의 기도를 하시는 그분들, 믿은대로 – 박목사 표현에 의하면 믿음은 명사이니 동사화해야 한다는 말에 동조하여 – 된다면, 인천 앞바다는 이미 바다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 “서커스를 보여주세요”라고 칭얼거리는 행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박목사가 말했듯이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 했다. 그렇다. 필자는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 하나가 “죽음”이고 박목사도 인정했다. 그러나, 믿으면 죽지도 않아야 되는데 다 죽기 때문에, 그래서 믿음의 실체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만이 그 빌미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쯤에서 박목사의 착각 – 믿음을 절대화한 착각이 드러나는 것이다. 필자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이것을 깨달았다.

필자는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 말하여 믿음을 절대화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누구를 향해 믿음 있다/없다 크다/작다라 말할 권세가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과 동기 동창이거나 예수의 형님뻘쯤 된다면야 이해가 되겠지요.

설교초반에, 시리아 선교담을 말히면서, 시리아땅에 말씀과 예배가 있게 하겠다고 하는데,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다. 거기에도 유대인 타운 기독교인 타운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만을 박목사는 알지만, 요한복음이 쓰여진 곳이 바로 시리아땅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시리아에 복음을 전하고,,” 이런 말은 낯간지러워 못하는 법이다.

오늘 설교에서 한가지 얻은 것이라면, 다행(?)스럽게도, 박목사는 딱 한번 말한것으로,

“믿음은 한번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계속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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