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한인교회-한석현목사-설교비평-이것이냐 저것이냐

이번 설교에 대한 본문 말씀을 여기에 옮기려 했으나 본한인교회 웹사이트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설교를 들어보면 로마서 6장 일부분으로 추측할 수 있으나, 전체 내용의 전개상 6장 전체와 7장 6절까지가 본문 말씀로 간주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로마서 강해 시리즈 설교중 한편인 오늘의 설교는, 필자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설교 “선택”이었음을 빍혀둔다.

이유는, 필자가 들어본 바로는 한마디로 잘 된 설교이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와 닿은 강력한 인상은, 설교자가 택한 본문의 성경 텍스트에 시종일관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청중인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중요하다. 시종일관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쫓아가는데 집중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는 죄인이다” “회개해라” “건강복” “자식복 재물복 비즈니스복” 이런 류의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 텍스트에 대한 필자의 이해를 높여 하나님의 생각,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붙잡고자 애를 쓴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제목의 오늘 설교의 본문 말씀

본문말씀: 로마서 6장 15-23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설교의 내용상 7장 1-4절도 본문말씀에 속한다고 필자가 판단했다.

본문말씀: 로마서 7장 1-4

1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본한인교회 한석현 목사(이하 한목사)는 본문 로마서 6장 15절을 다시 한번 읽은 후에, 핵심 단어로서 법, 은혜 그리고 죄를 제시하여, 오늘의 주제가 상당한 무게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교회내에서 너무나 흔하게 듣는 단어들이고 또 우리는 피상적이지만 대충 그 단어들의 뜻도 잘안다고 당연시 해왔다. 어떻게 보면, 율법=신앙생활, 은혜=복, 죄=사망 이런 공식이 어느 정도는 성립한다고 보는 것은 필자의 무리한 추측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오늘의 설교는 한목사 말마따나 무거운(heavy) 주제로 갈것 같아서, “강해”의 성격도 있는 설교이니까 어느정도는 감수할 각오(?)를 하면서 동영상을 시작했다.

한 목사는, 지난 주의 설교는 6장 1절에서 언급된 죄와 은혜에 대해 촛점을 맞춘 것임을 말함으로서 이번 설교는 지난 주와 맥락이 닿아 있음을 상기시켰다. 필자의 생각에, 이것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어 감에 있어서 취해야 할 매우 유익한 태도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사려된다. 흔한 예로,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욥기서의 말씀을 달랑 한 문장만 취해 목판에 조각하여 벽에 걸어놓은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성경을 읽지않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일 수가 있다.

그 문장의 앞 뒤를 살펴보면, 그렇게 고상한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신도인 우리들은 흔히 그런 오류에 빠지기 쉽다. 좋은 말은 귀에 잘 들어 오는데, 진짜로 중요한 메세지는 한눈에 안 들어오게 하는 필치로 쓰여져 있어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다. 물론, 이 설교는 시리즈 강해설교이기 때문에 한 목사가 어쩔 수없이 그렇게 표현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서도.

한 목사는, 1장에서부터 4장까지에서 인류의 과거 상태 – 죄 아래 놓여있던 상태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말하고자 하는 것임을, 5장에서 부터 오늘 본문이 포함 된 8장까지에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내용이라고 말함으로서, 로마서를 읽어 가는 청중을 향하여, 지금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빌어 하나님의 말씀의 바다에 청중 각 개인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재차 일깨운다.

그러면서, 한 목사는 청중의 입장이 되어 객석에 앉아 다음과 같은 문제를 스스로 던진다.

구약에서는 의로워지려면 율법지키면 되었는데 신약시대인 지금은 어떻게 해야하나?

신약과 구약, 은혜의 복음과 율법의 관계는 무엇인가?

의롭게 된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러면 과거 율법을 어떻게 바라 보아야하는가?

필자의 생각에, 이러한 질문들은 평신도로서 생각은 할 수있을지언정 좀체로 하기 힘든 것들이다. 왜냐하면, 여러분 주위에서 평생을 신앙생활하신 분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필자는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평신도로서의 패배의식이 숨겨져 있다.

나는 평신도 당신은 성경을 전공한 목사, 평신도인 내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일종의 불경스러운 일로 비쳐질지 모른다는 염려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순종의 미덕을 발휘하여 “율법을 어긴 나는 죄사함의 은혜받으면 모든 것이 그만” 이라는 안이함일 수도 있다.

한 목사의 설교를 계속 들어보자.

예수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가 모두 사해졌으니 계속 죄를 지어도, 그리고 짓는 죄마다 예수의 죽음으로 모두 용서가 된다니, 죄짓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는 논리에 대해 구원파 영지주의 American Fundamentalist들의 주장을 예로 인용하여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

본문 6장 15절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다시 한번 읽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은혜와 죄, 은혜와 율법, 율법과 죄의 관계 라고 말한다.

이해를 돕기위해 한목사가 제시한 예화를 필자가 정리해보면,

“폭군 남편을 둔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가,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은 남편이 죽어 없어지거나 아니면 자기가 죽여버리거나 아니면 도망쳐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죽지도 않고 당장 죽을 가능성도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죽이는 것은 법으로 용납이 않되며 도망쳐 버리는 것도 법으로 혀용이 아니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가 택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자기 스스로 죽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폭군 남편은 성경의 “율법” 역할이고, 여자가 스스로 죽어버리는 일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 그래서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이다.

한목사의 이러한 설정은, 로마서 전체를 꿰 뚫고 가는 바울의 일관 된 기독교 교리를 평신도들이 이해함에 있어서 대단히 훌륭한 것이다. 사실 바울이 써 내려간 로마서는 기독교도의 대헌장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필자는 본적이 있다.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더라도, 바울이 지 금 써 내려가고 있는 로마서의 이야기 전개 방법은 기독교들이 전도의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하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피켓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겠으나, 소통의 방법에 있어서는 그리 현명한 방법이 못되는 데 반해, “왜 예수인가”를 여기 바울의 로마서처럼 crystal clear한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더 “세련”된 방법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시, 한목사는 은혜와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예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하여 율법없이 살아도 되는것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 후, 그 답으로서 7장 1절-6절을 제시하는데,

“즉 예수를 몰랐을 때는 율법과 결혼해서 살았다, 그러나 그 율법은 언제나 나에게 죄를 지었다는 것만을 깨우쳐 줄 뿐 나를 사랑할줄 모른다, 율법은 하나님 말씀이기에 율법이 죽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죽는 일 만이, 율법이라는 폭군 남편으로 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의 증명은,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이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다시 예수와 함께 살아난 것이다. 바울은 은혜아래에 있는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는 관계가 없음을 말한다. 지금우리는 예수와 다시 재혼하기 위해 기다리는 상태에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상태를 오해하면, 생각이 잘못되면 구원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에 대한 경고로, 바울은 6장-16절에서부터 은혜와 율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감옥에 갇힌자는 감옥속의 룰에 따라야한다. 감옥밖의 사람들은 감옥밖의 룰에 따라 살아야한다. 감옥밖의 룰을 어기면 다시 감옥으로 가서 감옥의 룰을 강요받는다. 피조물인 우리는 감옥 안에 있던 밖에 있던, 어차피 한쪾 편에 굴종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의 은혜의 종이 되던지, 재물 쾌락의 종이 되던지, 우리는 피조물로서 절대적인 자유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세계관이자 Assumption이다.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감옥 밖의 자유시민으로서의 규율을 지키며 살든지 (자유시민이 되는 일에 종이 되던지) 감옥안 에서 감옥의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든지, 둘중의 하나밖에는 우리에게 선택이 없다.”

그러면서 한목사는 한용운의 시 “복종”을 읊었다.

필자의 생각에는, 오늘 한목사의 설교에는 군더더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관련있을 것 같은 성경 구절 나열하기, 충격적 예화, 자신만의 신변잡기, 목회이야기등등 군더더기가 없었음은 물론, 강해설교가 갖기 쉬운 딱딱함과 지루함을 아주 쉬운 상황설정으로 피해 갔다. 더우기, 그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울이 남긴 그 책의 텍스트에 시종일관 천착함으로서 청중들을 바울의 세계속으로 빠져 들게 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본한인교회-한석현목사-설교비평-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대한 한개의 댓글

  1. 복종(服從)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 만해 한용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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