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스쿨 탄생배경

바보스쿨 닷컴 탄생 배경

written by sitebuilder, Feb 2010

이런 저런 이유로서 여러 목사의 설교를 들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한결 같이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그런데, 듣고 나서 곰곰히 뒤돌아 생각해보면, 그들이 대중에게 선포한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나라, 하나님 말씀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따지고 보면 그 본질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주로 말한다거나, 교인들을 가르침의 대상 정도로만 여기는 듯한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려니 하고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살상용 군사 목적으로 시작한 통신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은 인터넷이라는 강력한 도구로 인해 성도의 서로 교통함이 더욱 광범위하게 빈번해짐에 따라, 이제 세상 어떤 목사도 숨어있을 수 없게 되었다. 특정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 가지않고도 들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밝은 세상인가.

해당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출석하는 교회 담임 목사 설교패턴에 이미 알게모르게 익숙해져 있다. “은혜스럽다” “은혜가 되었다”라고 대부분 말한다. 긍정의 힘이 작용해서 어지간하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다음 주일 설교를 기대한다. 그런 현상은, “이렇게 해도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구나” 하는 일종의 나태감내지는 착각으로 설교자에게 그대로 부메랑으로 돌아간다. 대부분의 신실한 교인들께는 정말 죄송스러운 질문이지만, “왜 일요일에 교회에 꼭 가시는지요?”

주일 예배는 말그대로 일 주일에 한 번 나자신이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그 분과 만나는 진실로 거룩한 행위이고, 거기에는 표면적으로 그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특정 건물, 장소에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 어떤 특정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되는데 그사람이 제사장격인, 개신교에서는 목사라 칭한다. 예배함의 정점은 설교이고 그 설교(말씀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나만의 작은 세계로 부터 빠져 나와서 하나님과 예수 앞에, 내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그 분과 한번 겨뤄 보는 30-40분의 짧은 시간이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대단히 성서적이다. 야곱이 불구가 된 이유가 성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 거룩한 예배가 지금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인 목사들이 시무하는 대형교회들의 설교를 주의를 기울여 들어보면, 방향타를 잃어버린 것이 평신도인 내 눈에도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목사가 왜, 주부들을 상대로 할 정도 수준의 교재로 동네 문화회관에서 제공하는 강습행위정도 수준 밖에는 안되는, 예를 들면 인생상담,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법, 행복한 가정생활 등등, 이런 류의 연설행위를 예배의 정점인 설교시간에 해야만하는가?

목사는 자기가 임의로 아니면 기도끝에 정한 본문 말씀에, 그냥 여기저기 비슷한 관련 구절 끌어다 모자이크 맞추듯 읽어내려 가기만하는 수준의 설교를 계속해도 되는건가? 사실, 옛날 관주 성경 보면 절마다 깨알같이 한문 숫자와 성서 책이름의 줄인 이름과 함께 주석으로 쓰여져 있는 데 관련된 말씀을 나타낸다. 목사는 평신도인 우리보다 당연히 많은 성경구절을 꿰고 있다. 우리는, 정해진 본문 말씀에 관련되는 관련 성경구절을 꿰어 맞추어 읽어내려가는 것으로 귀중한 예배시간을 다 소비하는 목사들을 많이 본다.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는 우리들의 고정 관념이, 판단의 영역밖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안이함을 정당화하고 있다. 자신들의 본연 의무는 방기한 채, 성도의 비판에 “판단”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들이 대는 것이 과연 성서적인가? 주의 종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이기에 성도는 결코 성서적이지 못한 설교를 평생 듣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가르치는 자야, 너희가 어찌 배울 줄은 모르느냐”

좀 더 나아가, 목사가 왜 예배시간에 도덕선생 역할을 해야하는가, 더우기 소위 “잘 나간다”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의 그런 행태를 보고 더이상 참을 수가 없기에 이 사이트를 개설한다. 그들은 배가 부를 대로 불러있다. 등도 따습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이라도 가능한 시스템속에서 알아서 설설기는 장로 안수집사 이런 계급장의 장막너머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다. 어떻게 저들이, 단돈 몇달러를 벌기위해, 저들이 죄악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술, 담배, 폭력물 비디오, 사행성 복권, (어떤 곳에서는 프랜차이즈 계약에 의해 도색잡지도 진열해야만 하는 경우 있다) 등을 팔아야만 하는 천갈래 만갈래 찢어져 무너져 내리는 내 마음을 알겠는가. 그러면서 정작 해야할 설교말씀 준비는 자신들이 섬겨야 할 성도들이 생활 전선에서 감내해야 하는 만큼 하고 있는지 나는 대답 듣기를 원한다.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다. “교회일이 너무 과중하신데……” 옳은 말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클 수록 목사 혼자서 할 수도 없거니와, 장로 집사는 왜 세웠는가? 장로 집사의 일을 목사가 하려니까 일이 많아진다. 과연 교회의 일이 먼저인가 말씀선포가 먼저인가, 아주 간명한 답이 있을 뿐이다.

나는, 신학교를 다닌 사람도 아니다. 교회에서 큰 임무를 맡고 있지도 않다. 그냥 평신도이다. 교회에서 귀따갑게 듣는 이야기가 있다, “말씀”이다. “말씀대로”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야한다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그들이 강권하는 대로, 말씀을 좀 Serious하게 들여다 보기로 마음 먹었고, 그대로 한번 해봤다. 내가 읽은 성경(예를들면 요한복음전체 혹은 다니엘서)을 내가 잘 이해하고 깨달았는가를 알기 위해 요한복음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동영상 사이트에 찾아가서 실제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의(목사들) 입에서 나오는 말을 직접 듣곤 했다. 나는 그냥 그런 평신도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뭔지는 딱 말할 수 없는 것이 머리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목사가 하나님의 세계로 청중을 이끌어 가는가, 아니면 무수한 성경구절 갖다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혹은 위인들의 이야기가 설교의 중심에 있어, “ABC같은 분도 그랬는데, 나도 그래야지”하는 정도의 “용기”만을 불어 넣기만 하고 마는가, 아니면 평신도는 목사들에게 그저 훈계의 대상으로만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대체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입으로는 예수를 외치지만, 행동은 예수가 갔던 길과는 멀어도 한참 먼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께서 광야 시험 마지막 세번째 문제 – “사탄이 높은 곳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한번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 – 에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주 너의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이 말은 거꾸로 해석하면, 세상에서 권력을 쥐고 떵떵거리는 목사들은 사단에게 굴복했다는 역설이 가능하다. (이런 깨달음은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평신도라고 해서 안 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이러한 역설은 우리교우중 한분의 통찰력임을 밝혀둔다.) 역사적으로도 그것은 사실로 입증된다. 가깝게는 12.12 군부 구테타에 이어 광주학살을 주도한 사람들을 위해 목사들이 근사한 호텔에서 조찬기도회를 열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했던 이삭이 야곱에게 했던 “축복”행위를 하지 않았던가. 굴욕을 넘어선 굴복의 삶인 것이다.

나는, 광역 토론토의 대형교회를 타겟으로 시간이 되는 대로 그들의 주일 낮 대예배 설교를 동영상으로 듣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피력하고자 한다. 작은 교회라고 해서 하나님 말씀마저 작을 수는 없다. 대형교회라서 하나님 말씀마저 대형이라는 것은 더 더욱 아니고, 실제로 대형교회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오히려 “와-우 설교는 별로 들을 것이 없는데 교회는 크구나” 하는 신비감 같은 것이 마음에 일어난다. 평신도가 깨어 있어야, 우리교회 목회자가 깨어 있고, 그가 사회를 깨우고, 국가와 세계를 깨우게 되어 그들이 일관되게 되네이는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 나라가 편만해질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평신도가 깨어 있음으로서,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거나 목사로서의 자질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하나님 일을 한다라고 하면서 본업에 충실치 못하는 성경에 기록된 바 “거짓 교사”들은, 자연적으로 도태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이다. 나는 이 사이트를 통해 깨어 있는 기독교도들과 교통하기를 원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 나도 인간인지라마음에 걸림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글을 읽으시고 마음이 동하시는분은, 이번주 교회에 바치실 십일조 딱 반만 쪼개서, 이웃의 작은 교회에 들리셔서 헌금봉투 픽업하신 후에 교회 목사님께 T4-slip을(세금혜택용 영수증) 발행해 달라는 요구와 함께 거기에 헌금하시라. 왜 꼭 내가 나가는 초대형교회에만 헌금을 해야 하나?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살림살이 어려운 작은 교회에 지나가다 들려서 헌금하고 나머지를 다시 내가 다니는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비성경적인가? 또는 갑자기 헌금액수가 줄면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책망이라도 듣는다는 말인가? 헌금 덜 한다고 책망하는 교회? 거기에 예수는 없다. 단언한다. 예수 없다. 하나님 없다. 목사의 욕심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 내 주 예수의 몸된 교회는 언제나 문제 없다. 거기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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