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교회-노승환목사-설교비평-교회의 본질

노승환목사 사진오늘은 밀알교회 노승환 목사(이하 노목사)의 “벽돌로 지은 바벨탑, 산돌로 지은 교회”라는 제목으로 1월 9일에 있었던 설교를 대상으로 독후감을 쓴다. 사실 이 설교 바로 위의 야고보 강해 설교를 타겟으로 하여 동영상을 띄웠으나, 밀알 교회가 곧 새 생전으로 입당이 예정되어 있어, 설교의 포커스가 그 쪽으로 치우칠 경향이 있겠다 싶어, 몇분 지나지 않아 대상을 바꿔 이 설교를 대상으로 삼았다.

사족을 약간 더 하면, 노목사는 매우 민감한 문제를 대담하게 건드린다는 첫인상이었다. 한가지 예로서, 야고보서는 믿음에 더하여 행동을 강조하기 때문에 마틴 루터가 자기의 주장과 상충되어 싫어했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어땟길래 그들이 싫어 했는지, 그것이 자기만의 생각인지 이미 학계에서 검증된 것인지 밝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 설교에서, 대단히 위험한 진술을 쏟아놓는다. 그것은 이글 중하반부에서 언급되어질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창세기 창세기 11:1-4, 베드로전서 2:1-5 두군데서 뽑았다.

창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창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벧전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벧전 2: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창세기 11장 서반은 그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이다.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키워드가 바벨탑이니, 나는 당연히 그에 대한 일반 청중의 이해를 돕기위해 대략적인 설명이 있으려니 기대했지만, 탑의 건축재료인 벽돌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 약간 아쉬웠다.

내가 아는 바로는, 창세기 11장은 비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에 등장하는 어떻게 보면 성경의 첫부분일 수도 있는, 그러니까 성경이 역사서라고만 본다면, 그런 부분이다. 아브라함(정확하게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 지방을 떠나는 장면까지가 기록된 장이다. 바로 이 장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이야기가 바벨탑이다. 그리고 12장 부터 드디어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자손, 자손의 자손, 결국 예수이야기까지 가게 된다.

노목사는 돌과 흙을 대비시켜, 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은 인간적이고 돌은 신성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러면서 흙은 성경에서 약간 덜 좋은 의미로 쓰였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예제는, 고등학교 지구과학을 이수한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하나님적인 성전을 강조하려고 대비한 것임을 잘 안다.

돌이라는게 별건가요, 흙이 지하에서 흙 자체 무게때문에 더 딱딱해졌거나, 오랜 기간 바닷속에서 물의 무게에 소금이 바위로 굳어져 그 부분이 지가 변동에 의해 해면위로 융기하여 그것을 파다가 GTA 지방 정부들에게 눈 올 때 뿌리라고 파는 염암, 마그마가 땅위로 흘러 나왔을 때 식는 시점에 따라 돌(현무암)이 되느냐 아니면 그냥 진흙이 되느냐, 혹은 현무암이 풍화 작용에 의하여 물에 깎여 강으로 흘러 들어 쌓이고 그것이 굳어지면 또 좀 덜 딱딱한 흙이되는 뭘, 이런 작용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본다면, 굳이 벽돌과 그냥 돌과 구분할 필요까지 있었을까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요즘 같으면 벽돌에 독극성 화학 물질을 첨가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바벨탑은 그냥 벽돌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교만의 상징이다, 요정도는, 교회가 아니더라도 이미 귀가 닳도록 들은 이야기이다. 왜 그것이 인간의 교만의 상징이어야 했는가 이런 부연 설명도 있을 법 했건만.

사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창세기가 쓰여진 시점이 주전 400년 중반정도 된다는 말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그 전에 이미 탑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더군다나, 주전 597년 이스라엘이 함락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탑을 보고 어떤 심정이었을까, 예를 들어, 70년대의 한국의 시골 소년을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에 태워 맨하탄의 엠파이어빌딩 꼭대기에 데려간 경우를 상상해보자.

이 소년의 가치관에 어떤 변화가 생기겠는가를. 물론 11장의 시점은 분명히 바벨탑이 건설중이었음을 잊지않는다. 그런 탑을 지금 창세기 저자는, 유대땅 언저리에서 한낱 우물이나 파서 삶의 터전을 이리 저리 옮겨다니던 유대인 성서기자는 왜 그것을 교만의 상징이라고 설파했을까, 거기에는 유대인 특유의 열등감 같은 것이 작용해서 너무나 멋진 탑을 보고 시샘으로 그런 글을 쓴것은 아닌가.

창세기가 쓰여진 시점이 주전 500년이라 한다면, 즉 모세 5경이 쓰여진 시점이, 그전에는 유대이즘에 관련한 변변한 문헌하나 제대로 없는 민족이, 당시의 세계의 중심이었던 바벨론문명 민족에게 무슨 근거로 야훼를 믿어라 권할 수 있었으며, 혹은 구술로 이것이 하나님이다 믿어라 했는데 바빌론 사람들이 안믿고 멸망의 길로 들어 섰다 이 말인가.

또한 노목사는, 바벨탑이 바빌론 이미지로 요한계시록 끝까지 관통한다고 했는데, 자기 자랑인가, 그냥 한 번 해본 말인가, 아니면 구체적으로 그에 관한 논문이라도 한편 써 본 적 있는가? 내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화학시간 주기율표의 원소기호 읽듯이 노목사가 어물쩡 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신도이고, 목사들이 하라는 대로 성경을 좀 serious하게 읽는 사람중 한사람이다. 듣기좋은말, 가슴으로 믿어라, 말씀은 잘 아는데 실천이 안되면, 기도가 부족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냥 아멘으로 믿어라,,,,,, 이런 식으로 성도들을 몰아 세우는 것은 그냥 평신도로 있어라. 이 말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나는 목사들도 평신도들 처럼 논문 쓰고 학위 받고 목사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

어쨋든 노목사는 그냥 그렇게 믿으세요 하는 말로 밖에는 안들렸다. 그래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나는 말한다.

나름대로, 노목사는 구약의 바벨탑이야기에서 신약의 베드로서의 산돌을 결부시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끌어 내어 청중들을 하나님 나라 이야기 속으로 이끌어 가려한 노력과 안목은 높이 산다. 대개 설교를 잘하시는 분들이 그런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분들은 줄창 성경구절이나 암송하는 그런 방식은 취하지 않는다.

그렇게해서 노목사는 지금 밀알 교회가 당면한 새성전 입당을 염두에 둔 듯, 베드로서의 예수같은 산돌처럼 연합하고 사랑하고 이해해주고 하나되는 그것이, 신령한 집을 짓는 교회이어야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면 그 안에서 신령한 제사를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아뿔싸,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파괴력이 대단한 말을 한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한 곳이기 이전에 교회라는 말처럼 성도들이 연합하는 곳이다

라고 단언 해버리고 만다.

교회의 본질적인 것은 성도들의 모임 연합함, 왜 연합하는가? 서로 사랑하려고 모인다 연합해서 하나되려고 모인다 생명력을 가지고 관계 맺으려고 모인다고 노목사는 말한다. 그렇게 모여서 신령한 제사를 드리게 되고 자녀교육도 하고 선교도 하고 구제도 일어난다고 노목사는 말한다.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다 이 이야기를 먼저하게 되면 예배하는 방법때문에 갈라지고 전도를 어떻게 하는가 그것 때문에 교파가 갈라진다, 그렇게 설명을 하면서, 교회는 일차적으로 서로 연합하는 것이다라고 노목사는 재차 못을 박아버린다. 필자에게는, 안타까운 시간만이 흘러 간다.

노목사는 또 다시 강조한다, 교회는 성도가 예배하는 곳 이기 이전에 다른 성도들과 서로 사랑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말이 사실이면, 차라리 주일 아침에 팀호튼 커피샵으로 모이자. 뭣 때문에 그런 어마어마한 교회당을, 밀알교회는 짓는다는 말인가? 그것이 하나님 영광인가? 연합하여 사랑을 나누는 곳이라면 교회당 건물에 차타고 멀리까지 갈 필요 있나, 집근처 사람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노목사가 한번만 이야기했다 하여도 그냥 교회의 지금 현실적인 문제를 강조하려고 그러는구나 하고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몇번에 결쳐 이야기한 것으로 봐서, 노목사의 교회에 대한 철학을 엿보는 정도를 넘어 정면에서 확실하게 보게되었다.

하긴, 예수께서 교회 세우신 적 없지요. 공중 나는 새 한마리도 깃 들일 곳이 있었건만 변변히 머리 둘 곳도 없었던 예수가 가슴깊은 곳에서 내 마음을 울린다. 예수께서, 이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마라고 화를 내시고 clean up 하심으로 죽음의 길로 들어 섰던 것을 노목사도 잘 알텐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고, 거기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이것이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노목사는 그 반대 순서의 말을 몇번에 걸쳐 말한다.

또한 노목사는 뜬금없이 앞뒤 설명도 없이 무조건 전체 동성연애자에 대해서 동성애는 회개해야 하는 가증스런 죄이다라고 말한다. 나도 그점은 인정한다. 다만, 멀쩡한 성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런 일에 탐닉하는 것은 노 목사의 주장에 전적으로 아멘이다. 그러나, 노 목사에게 반문한다. 그들의 옷을 전부 벗기고 하체, 즉 그들의 성기를 본일이 있는가?

1000명중에 한 사람이라도 정상적인 성행위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된 사람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을 할까?

노목사도 결혼해서 자녀가 있나요?

Erection -> Intercourse -> Ejacuation 이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소위 Sex의 과정이다. 이런 행위 없이 어떻게 자녀를 두었는가 묻고 싶다.

마음속으로는 그런 정욕이 일어나지만, 성기의 결함때문에 우리들과 똑같은 Sex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는 사람들, 그것도 1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닌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았는가?

그 사람들에게 예수의 길을 가겠다고 작정한 목사가 피할 길을 열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나는 그에 대한 답이 있느냐 하면 나도 답이 없다. 설령 내가 답이라고 내 놓는들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실, 내가 답을 내놓을수 있을 정도의 문제라면, 벌써 천번도 더 해결되었으리라. 그렇지만 노목사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말을 아껴야 했다.

노목사가 자녀를 갖게된 구체적인 행위와 그 행위중에 있었던 마음과 육신의 상태를 곰곰히 기억해보면, 그들이 어떠한 고통가운데 살아가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다. 특히 만에 하나, 그 하나까지도 어우러야할 목사로부터의 그런 말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온 그런 동성연애자들도 껴안아라 라고 말을 하는데, 그 역시 신뢰성에 의심이 간다.

차라리 노코멘트가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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