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교회-노승환목사-설교비평-감당하기 힘듭니다!

본문말씀: 마태 복음17:14-23

14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8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본문말씀: 누가복음 10:17-20

17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위와 말씀을 본문으로 “(예수님 성품 시리즈 – 6) 감당하기 힘듭니다!” 라는 제목하에 행해진 노목사 설교를 대상으로한다.먼저, 필자는 이 설교를 행한 노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밀알교회가 성전건축이 거의 완성되어 입당 준비를 하는기간중에 있음을 설교를통해 알게되었다.

그리고 노목사의 교인들을 향한 충정어린 독려가 설교 곳곳에서 적쟎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설교는설교이다. 주일 하루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시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배함의 정점, 그것이 바로 설교이기 때문에 성전 건축, 그 문제는 설교를 설교답게 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없다.

오늘 노목사의 설교는 완전히 실망 덩어리 그자체이다. “예수님 성품”시리즈 라는 제목 자체로는 오늘 설교내용과 잘 안맞을 것이라고 노목사는 먼저 한 자락 깔고 들어갔다. 그것은 노목사만의 염려가 아니라 필자의 염려이기도 했다. 제목만 놓고 본다면, “주일학교” 냄새가 솔솔 나지 않는가?

필자는 노목사에게 강력히 권고한다 “예수님 성품” 이렇게 쓰지말고 “예수의 성품” 이렇게 쓰기를 권고한다. 성경에도 “예수께서” 이렇게 쓰여있다. 왜 “님”자를 자꾸 붙여 말하여 사람들을 세뇌하려 하는가? 예수는 분명히 우리를 향하여 형제 벗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작은 것부터 잘 따라하시기를. 믿음이니 성령이니 그런 커다란 거도 좋지만요.

노목사의 오늘 설교 총 시간은 동영상 플레이어 러닝타임으로 33분 남짓이다.

노목사는, 1마일 전문 달리기 육상 선수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한다. 4분여를 육상 선수, 시도와 실패(Trial and Error)이야기에 할애하고 , 예수는 간혹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면서 이는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목사는, 자신의 부모님이 어렸을 적 자신의 신체적 성장을 위해 팔다리를 잡아다녔지만, 실패했고 그래서 루저(Loser)가 되었다는 데까지 물경 총 설교시간의 25%인 8분 10초를 소비한 후에 본문말씀에 이르른다.

노목사는, 본문에 대한 설명으로서,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께 데려와 귀신을 내 보낸후, 당신 제자들에게 갔을 때는 왜 못 고쳤는가라는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의 항변에. 이에 예수는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꾸짖으셨다고 말한다.

노목사는 계속해서, 믿음은 전수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귀신을 내쫒는 능력은, 내가 예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를 통해 예수의 나타난다는 것임과 기도를 많이하면, 경건의 생활을 심화하면 권능 믿음을 갖게된다는 것은 옳지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능력의 원천에 대한 것이지, 전수해야할 대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라고 노목사는 설파한다.

예수의 명령에 성공한 경우 성공한 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데서 예수는 믿음의 교훈을 가르친다고 노목사는 말한다. 누가복음의 파견된 70인이 성공담에서, 귀신이 항복한 것에 대해 기뻐하는 대신 너희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즉 능력과 신비체험에서 기쁨을 찾지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에 대해 기뻐하라는 말에 더 무게를 두어야한다고 노목사는 주장한다.

설교 도입부에 8분10초를 소비한 후 총 설교 시간이 3분의 2인 22분이 지날때까지, 정확하게 약 14분동안 본문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와 파견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화제가 봉사로 옮겨간다. 그러니까 결국은 설교시간 32분에서 14분정도를 본문말씀에 할애한 셈이다.

노목사가 이제 새로 갈아 탄 “화제”인 봉사의 당위성을 찾으려고 시작하는 말은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를 도구로 삼지않고 목적으로 삼는다,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 성도들이 봉사해야한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노목사는 단언한다. 성도가 부흥하기 위해서 봉사해야한다고 노목사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진다.

봉사 즉 섬김의 대상이 누구인가?

필자의 대답은,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것이고,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라면, 과부와 고아 가난한 자 억눌린 자들이다.

여기에 교회 밖의 사람들이냐 교회안의 사람들이냐, 이런 질문은 무의미한 것이다. 결국,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먼저이다.

자- 지금 노목사의 말대로라면, 섬기는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라는 성경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봐서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먼저이다. 필자는 묻는다.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 조차도 봉사하는 사람들의 만족을 위한 이유에서인가?”

필자의 극단적인 예를 들겠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한달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있는 중병환자를 돕는 일도, 섬기는일도, 결국 기독교도 자기 자신의 부흥을 위해서인가? 한달 후에 죽어야하는 사람은, 죽어가면서까지 봉사자의 만족(부흥)을 위한 도구여야만 하는가?

대답이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목사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을 말하면서 그것이 하나님 말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천착하면 그런일이 없을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다음의 노목사의 말에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12명 제자를 파견한 것은, 그 들이 만나는 사람들 보다 12명이 목적이다.” 라는 노목사의 말.

그의 말대로라면, 예수가 파견한 12명 제자가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할 대상은 그리 관심사가 아니라는 뜻으로, 그리고 복음 그자체도 관심도가 12명제자보다 덜 한것으로 들리는 데, 아무리 성경을 전공한 목사가 하는 말이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노목사는 이런 의연함도 보인다. “밀알교회는 교회 성장을 위해서 성도들에게 봉사를 강요하지 않는 대신 성도들의 부흥과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봉사를 강요한다.” 필자는, 노목사가 말하는 성도들의 부흥이란 무엇인가? 에 궁금증이 있었지만, 노목사는 특별한 설명이 없다.

노목사는, “섬김이 없으면 채워지지않는 영적인 영역이 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이다, 예배, QT도하는데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섬기지않아서 그렇다, 예배만하고 돌아가는 교회는 나쁜 교회이다.” 라고 단언한다.

노목사는, 대형교회에서 흔히 볼수 있는 것처럼, 예배만 보고 가는 사람, 등록하래도 안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계속되면 이기적이고 밸러스깨진 신앙생활을 하기 십상이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노목사의 이런 발언은 교회를 이런교회 저런교회로, 성도들을 향해서는 이런 성도 저런 성도로 구별짓는 성숙치 못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노목사도 본인의 이번 설교에서 말했다시피, 설교 준비를 하면서 자신이 밀알교회에 가장 은혜를 많이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삼아 말했다.

그 결과로, 교회로 부터 “이런 성도 저런 성도”들로부터 바쳐진 헌금으로 부터 급료를 받는다. 이런 성도에게로 부터 나온 부분은 얼마이고, 저런 성도에게로 부터 나온 부분은 얼마이고, 이런 식으로 계산하나? 그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나쁜 교회에 시무하는 목사는 나쁜 목사라는 등식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교회가면 반드시 등록해야한다는 규정이 성경 어디에 쓰여있는가?

노목사는 자신이 설교준비를 하면서 받은 많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성도들을 향해 미안한 마음을 가져함이 옳다.

목사는 돈도 받고 은혜받고, 성도는 돈 바치고 목사가 씌워준 죄책감을 은혜인양 자신을 합리화하고,,,,,,

필자가 보건대 이건 분명히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아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쓰여있다.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리라.” 필자가보기에는 노목사의 경우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구로 흘러든 경우이다.

또한 노목사는, 봉사는 반드시 밀알교회 안에서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여 의연함을 보인다. 그런데, 봉사를 위한 교육과 훈련은 교회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단언한다. 참으로 해괴한 논리이다. 봉사, 그 섬김의 대상이 지금 도움을 필요로하는 어려운 지경에 있고, 누가 나서서 도와주겠다는 데 반드시 그 훈련은 교회내에서 받으라고? 예를 들어, 독거중인 환자에게 차를 태워주어 병원에 데려다 주고 싶은 봉사지원자가 운전면허가 없는 경우에 자동차면허교육도 교회에서 반드시 해야하나? 필자는, 노목사의 엉성하기 짝이 없는 논리전개에 참담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엉성한 논리의 이야기의 배경에는 노목사의 “봉사”에 대한 정의가 교회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즉, 노목사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재정부 찬양팀 예배안내 부억일등등 교회 내에서 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교인들이 일정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봉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노목사도 아니라고 부인하겠고 또 필자도 노목사의 부인을 인정한다하더라도, 오늘 설교의 내용상 “교회안에서의 봉사”로 국한시킨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예외없이, 성도들의, 아니 보통 인간이 지니는 성격상의 흔한 오류, 즉 일상생활에서 반복되는 죄 모난성격 이런 것들을 언급하므로서, 교인들의 죄책감을 건드린다. 그리고 그에 대한 위안으로서, 밀알교회가 성전건축하는것이 불가능한 일이이었지만 잘 진행되가고 있는 것은 성도들의 믿음때문이라고 노목사는 추켜세운다. 필자는, “믿음”의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노목사는 정확하게 측량해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노목사가 산정한 가치는 최소한 밀알교회 성전건축비용이상은 된다는 계산이 필자의 머리속에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밀알교회가 구상하고 있는 “북미주 2세교육을 책임질 기독교 교육연구소사역” – 일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노목사는 말한다. 그러면서 실패해도 밀알교회에겐 덕이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서는 노목사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필자는 본다. 만일 실패한다면 거기에 참여했던 대상자들 교육생들에 대해서, 그들이 소비한 시간 정렬 이런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시려나 필자는 궁금하다. 노목사의 변에 의하면, (밀알교회가) 믿음이 자랄수있는 성장의 기회가 될 것이란다. 참으로 무책임한 어이없는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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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노목사는 설교시간의 약 30%정도만 본문말씀의 설명에 할애 하였고, 그나마도 별도의 성서 텍스트 해석없이 자신의 주관만을 말했다. 나머지 시간은 자기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음으로서, 청중을 하나님의 말씀 세계로 이끌어 가지 못하여 하나님도 구경꾼 청중도 구경꾼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필자가 처음 제목을 보고 품었던 염려 그대로, 실망이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노목사의 성경읽기이다. 일반 직장인이 이런 damaged goods를 delivery하면 해고의 사유가 된다. 댓글에 남겨 두겠다.

“밀알교회-노승환목사-설교비평-감당하기 힘듭니다!”에 대한 한개의 댓글

  1. 그리고 이것은 필자의 지엽적인 이야기이지만, 노목사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을 행했다고
    말하는데, 다음은 창세기 11장에 쓰여 있는 말씀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다음의 창세기를 읽어가는데 있어서, 뭐 대단한 신학적 배경지식이라도 필요하단 말인가?

    창세기 11장

    27.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세기 12장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위에서 보듯이, 데라가 아브람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떠나서 머무른데가 하란땅이엇고, 거기서 아브람이 가나안땅을 향해 떠났다고 쓰여있다.

    그 어디에도, 갈대아 우르땅에서 아브람과 하나님의 직거래는 없어 보인다. 이후의 성경에서 그런일이 있었다는 것이 쓰여 있는데, 제가 모르고 잇는 것입니까? 누구 아시는 분 댓글로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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