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구역예배 8/18 2011

– 찬송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주의 : 옆에 붙여진 영상은 토론토 주사랑 교회의 찬앙사역 하시는 분들께서 바보스쿨 이곳에 올리신 것이 아니라 유투브(youtube.com)에 올리신 것을 필자가 퍼온 것입니다. 이분들과 이분들이 출석하고 계신 주사랑교회와, 당사이트 바보스쿨과 이글을 쓴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철저하게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만일 재생이 아니되면 왼쪽 하단의 세모표를 누르시어 재생시키시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위해 산 것이라.

 

– 설교 : 말씀 나누기 –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2장 전체

갈라디아서 2장 전체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 이스마엘은 이미 세상에 태어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 언약을 지키라, 네 자손의 몸에 나의 징표가 있어야 한다, 그 징표가 없으면 나를 배반했다는 뜻으로 알고 대를 끊어 버리겠다. 이 후로 너희 집에서 난 자이든지 돈 주고 사온 노예이든지 살에 징표를 박아두어 영원한 언약이 되리니….. 바로 할례입니다. 그 할례를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의 조강지처 사래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이삭이 곧 태어 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래는 90세였습니다.

그 후로 유대인들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바울 당시까지 2000천년 동안 끈질기게 살아냈습니다. 그로 부터 또 다시 2000년이 지난 오늘 바보스쿨 구역 예배에서, 바울 당시로 보면 거기서 다시 2000년전 부터 있어왔던 그리하여 바울의 몸에도 언약의 표시로 남아 있었던 바로 할례를 이야기의 시작으로 삼습니다.

할례가 유대인에게 행해지기 전에 하란땅에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2000여년이 지난 후에 바울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전자가 유대의 시작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의 시작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레이져 광선을 쬔 후, 적어도 십사년 후에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냥 간 것이 아니고 계시를 받아서 갔답니다. 어떻게 받았을까요, 또 어떤 계시를 받았을까요.

어떻게 받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2000년전에 DHL이 있었겠습니까 택배시스템이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하늘에서 무슨 계시 쪽지가 달랑 떨어지는 것이 계시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난밤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라고 말하는 목사가 허다합니다. 하나님과 직통으로 거래하고 있는 듯한 목사의 말, 그러면서 평신도인 당신들은 안될꺼야 은근히 뻐기는 듯한 말을 그대로 믿어 버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에 대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말로 전해져 들은 후 ‘잘 못 알고 있구나’ 라고 바울이 깨달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음을 2절에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라고 현재 진행형과 과거시제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나타났었던, 그리고 지금 나타나고 있는 현상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읽었다 이 뜻입니다.

바울의 계시의 내용이란, 자신이 지금 이방땅 안디옥에서 전하고 있는 복음의 본질에 대해 예루살렘 사람들이 오해를 하면 헛된일이 된다, 헛된 일이 되지 않게끔 하라는 예수의 지령이 계시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의도한 바와 진행되는 현상은 괴리가 있음을 바울이 직감했습니다.

3절에 느닷없이 할례를, 그것도 헬라인인 디도에게조차 할례시도가 있었음을, 언급합니다. 사실 그 말을 하고자 1장에서 이미 그렇게 뜸을 들였나 봅니다. 할례가 지금 문제의 중심에 있습니다. 사족입니다만, 바울은 유명한 사람에게는 따로 개인적으로 만나서 잘 설명해 주었다, 즉 프라이빗 레슨(private lesson)을 해주었다 이 말씀이지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설전을 폄으로서 빚어질지도 모르는 부끄러움을 피해가려 한 재치도 보입니다.

이러한 할례가 왜 문제가 되고 있는지 당시의 상황을 4절 부터 17절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대놓고 “가만히 들어 온 자” 라 하여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를 지목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유를 가진 우리를 종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의도까지 밝혀냈습니다. 그 와중에 도리어 야고보는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시무하는 예루살렘교회의 새신자가 되려면 할례유무를 필수사항으로 만들겠다. 바울 너는 이방땅에서 새신자에게 할례를 필수사항이 아닌 선택사항으로 놔도 나와 너의 복음 사역에는 하등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동의하냐, 동의하면 악수하자”

바울은 이 말끝에 야고보는 할례자의 사도요, 나는 무할례자의 사도라고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고 있읍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야고보가 할례자를 향한 사도라도 인정한 이가 자신은 무할례자를 향한 사도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사역에 큰 두줄기가 있었습니다. 유대 땅 본토에서 유대교가 이미 생활 그 자체인 유대인들을 상대로하는 복음사역과, 그외의 지역 그러니까 유대인협회 용어를 빌면 이방인(Gentile)들에 대한 복음사역이 그것입니다. 그가 서신서 여러곳에서 “나도 사도이다”라고 자주 강변한 기록으로 부터, 당대의 교계의 실세였던 야고보도 인정한 사도로서의 권위 즉 말빨이 먹혀들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열심히 전도해서 복음을 전하여 기독교도로 개종시켰는데 누군가가 바울이 말한 것을 뒤집어 버리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할례를 받아야 진정한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서 합의된 사항을 뒤집는 이러한 처사는 바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요.

다른 각도에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방인들 편에 서서 말입니다. 시중에 새로이 소개되고 있는 종교인 기독교의 신도가 되려면 유대인 처럼 할례를 먼저 해야되는구나,,, 차라리 회원가입 안하고 말지,,,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이런 말들을 즉 복음을 공들여 전했고 예루살렘에까지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온 줄 철석같이 알고 있었던 바울입니다. 이제 게바까지 동원(?)된 자신의 주무대에서 할례냐 무할례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라고 설파하던 바울, 그에게 게바의 이중생활은 이제 자라나기 시작하는 기독교의 뿌리를 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2장 11절에 기록된 바울이 토해낸 살벌한 진술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다, 참 거룩하게 보이시지요 책망할 일이 있기로 면책하였다,,, 제가 남대문 시장 바닥 용어로 다시 한번 번역해볼까요,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베드로씨! 당신 마침 잘만났다, 지난번 당신 어떻게 그렇게 이중행동을 할 수 있는 겁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면전에서 쫑코를 주어 묵사발을 만들었다” 이 정도로 심한 말입니다.

이렇게 심한 말을 바울이 실명을 들어 기록한 것을 보면, 바울은 이글을 쓰면서도 훗날 이 글이 성경이 되리라고는 짐작을 못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자~~ 이제 성경을 쓰기로 하자, 아랫 동네 너 김홍도 주일 성수 안했지,, 그러고도 네가 예수 믿는다고 하냐 아주 인류역사에 길이 남게 해주마 하면서 실명을 써서 성경을 기록하실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이 부분에 대해 다시 간단하게 상황 묘사를 해 보면,

어느 날 게바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현지 기독교도들과 밥상머리를 마주 했습니다. 밥을 맛있게 먹던 중에 일단의 사람들이 들이 닥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장 야고보를 추종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밥상머리에는 바나바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들을 보자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밥을 먹는게 아니고 그냥 밥먹는 것 구경만하고 있었을 뿐이었어..” 이렇게 말함으로서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가 아닌데 우연치 않게 있게 되었다고 행동했습니다.

필자의 경험, 종로 2가 뒷골목 곱창집에 친구하고 술마시러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엔 여러 테이블에서 이미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교회 장로님도 거기에 계셨습니다. 그 분은 이미 거나하게 잔을 비우셨고 한편으로는 담배연기도 멋지게 품어 내시면서 말이지요. 저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데도, 그때 그 분이 안절부절 못하던 그 모습이 아마 바로 게바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술 담배 안한다고 거룩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뒤에선 술담배 이상가는 죄악을 태연자약하게 일삼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의 말을 안 들었다하여 무조건 베드로와 같은 유대인 기독교도들을 나뿐(?)사람들로 “무조건 매도”하기 전에 한가지 알아 둘 필요가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당시에 유대교는 로마제국이 인정하는 여러 종교 중의 하나였습니다. 여러 종교를 인정한 이유는 소수민족의 종교를 인정해 두어, 즉 소수 민족에게 종교라는 아편을 주어 소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자는 로마정부의 정책이었습니다. 유대교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엄밀하게 카톨릭 성당은, 일반 로마시민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정부관료들에게는 단순히 미신일 뿐이었습니다.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미신이었습니다. 국가가 인정하는 공식종교는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오늘날, 길자연이가 교인들에게 후린 돈 수십억을 새끼 목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댓가로 투표를 사서 한국 기생충 협회의 회장이라는 감투를 구매했습니다. 사실이 다 밝혀져도 멀쩡합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계룡산 신도암 무당 협회에서 벌어졌다면, 상상이 되십니까? 지방 신문사 기사꺼리조차도 아니될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국가가 인정하는 종교를 버리고 미신을 믿겠습니까? 로마제국에는 그런데, 믿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만, 먼저 유대교 멤버쉽 홀더가 된 후에 종교시장에, 이제 갓 나온 브랜뉴(brand new) 종교인 기독교의 신도가 되는 절묘한 방법을 그들은 고안해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유대인이면서 기독교로 돌아선 사람들은 때로는 카멜레온 같은 처신을 해야했습니다.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면 “나는 유대교 멤버쉽 홀더입니다” 라고 하여 공식종교가 국가로 부터 보호를 받는 혜택을 누렸던 것이지요. 그냥 맨숭맨숭 단순 기독교도가 되어서는 미신을 믿는 위험에 빠질 확률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엾은 민초들에게 무턱대고 손가락질하기도 어려운 사정입니다. 이런 이유로 앞서 말한 “무조건 매도”는 우리의 눈에 무리수로 보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바울은 예루살렘 협약을 성사시켰고 모든 것이 순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즈음 베드로 사건이 터졌고 이를 목격하고 실상을 바로 알게 된 바울이, 아직도 자신의 구역에 예루살렘의 힘이 미치고 있음을 알고 좌절하는 장면이 바로 갈라디아서 전체입니다. 좌절의 끝에는 분노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바울의 주무대였던 안디옥은 분명히 이방땅 즉 로마의 속주의 도시였고 당연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의 추종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세력이 가만히 들어와서 말하기를 예수의 복음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대인의 정체성, 즉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음을 바울은 알아차렸습니다. 그의 귀에 들어온 이말은 바울이 겪은 예수사건 전체를 뿌리부터 무너뜨리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도대체 할례, 결국은 율법이, 결국은 유대교의 관습이 우리의 복음사역에 왜 필요해야만하는 것인지 그에 대한 설명을 2장 중반을 넘어서 마지막장까지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결국은 유대교와의 결별로 가는 수순 정석을 지금 바울은 분노를 애써 삭혀가며 써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레위기의 종교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레위기에 보면 먹는 것 가지고 엄청 따집니다. 다시 말해 누구와 어떤 밥상머리에 마주 앉는가 이 문제는 유대교도냐 아니냐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대로 사는가 아닌가 라는 뜻이지요. 바울은 그러한 밥먹는일 따위는 예수의 복음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그리하여 유대인의 할례나 식사문화를 이방인이 따르지 않더라도 예루살렘 교회에 출석하는 출신성분이 유대인인 기독교도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이미 예루살렘에서 확정 지은 줄로 알았습니다. 악수까지 했다고 적혀있네요. 다시말해 이방인과 유대인은 같다, 동격이다 이에 대해 서로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즉, 이방인이 유대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도 기독교도가 되는 데는 하등의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바울의 복음사역에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그리고 타협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고 만 것입니다.

게바 당신은 이방인 처럼 행동하면서 어떻게 이방인에게 유대관습을 따르라고 하느냐 이것이 바울이 책망한 이유입니다(14절). 차라리 유대인으로 돌아가라, 그런 후에 이방인을 향하여 유대인처럼 살아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행한 약속 파기에 대한 바울의 항변입니다.

18절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든다면서 자신에게 혹독하리만치 엄격한 잣대를 들이 댑니다. 즉 이대로 가면 죽도 밥도 아니다, 위기를 맞은 바울은 정면돌파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뿐만 아니라 수십여년전 부터 한국의 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양복입고 이마에 포마드 찐하게 바르고 운동장에 목사들이 바글바글 모여 들어 주여 주여를 외치면서 회개한다고 하는데 뭘 회개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세우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며 그것이 오늘 바울이 선언하고 있는 정면돌파입니다. 운동장에 가서 중언부언 횡설수설 듣는 그 시간에 돈 엄청 쳐바른 교회 서재에서나마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백성으로 밝히 깨닫게 하는 본업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면돌파임을 저들의 절대근시안구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20절에 이르러 바울은 분노끝에 울고 있습니다. 안디옥에서의 자신의 사역이 무너져 내림을 보고 괴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나의 나됨을 예수사건에서 부터 찾으려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아른 거려 저역시 이 글을 쓰다 말고 몇번이고 복음성가를 기타에 맞춰 불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장 1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눈에 밝히 보이거늘 은행 대출계 대리가 너희를 꾀더냐 모기지 브로커가 너희를 꾀더냐 25만달러짜리 벤틀리 자동차가 너희를 꾀더냐 교회당 새로 지어 놓은 이웃 큰교회 목사가 너희를 꾀더냐 성공한 목사라는 형용사가 너희를 꾀더냐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육체로 마치려느냐(3장 3절)

갈라디아 사람들아 어리석도다 어리석도다 바울은 이렇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밀린 집세라도 갚을 요량으로 한번만이라도 들를 만도 하건만, 놀랍게도 바울은 안디옥을 떠난 후 단 한번도 안디옥에 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참 지독한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게바의 체면을 묵사발 낸 후 안디옥을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하나님의 일 주의 일 목사의 이런 말만 들어가면 그 실상 내용은 어떻든 간에 일단 껍뻑 죽는 교회논리로 보면 변명의 여지가 많아 보입니다. 목사가 하는 말은 무조건 아멘 빨렐루야로 화답하는 이 시대 한국 교회의 논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바울이 베드로의 멋적어 하는 모습을 보고 면책(책임을 면한다는 면책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보고 책망한다는 뜻)을 하지 않고, 그래 그러는 수도 있지 혹은 내가 예수의 수제자에게 그렇게 까지 한다면 그게 덕이 되겠나 하면서 적당히 그들에게 동조했더라면, 완벽하게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겠지요.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선택되는 본문말씀을 찾을 성경책은 이 세상에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분명히, 신사참배 그리고 광주학살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우리의 교회는, 거기서 밥빌어 먹고 사는 거지목사들, 성경 책을 열기만 하면 거기는 우상이야기이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뿐인 것을. 신사참배한 목사와 그 목사가 안수한 새끼목사인 지리산 솔잎점 얼굴마담 목사들이 우상 숭배하면 지옥 간다고 떠들고 다닙니다. 허-걱. 대검으로 어린 딸아이 젖가슴을 도려낸 사건이 직선거리 300킬로 이내에서 벌어졌는데 아무말도 못하고 도리어 축복기도까지한 인간 백정 사돈집 목사들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마지막장 마지막절,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히지 말라는 그의 말은 그를 짓누르고 있던 종교시스템에 대한 도전장입니다. 그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신의 안방이었던 안디옥을 떠납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거짖 교사의 교설과 그의 망상이 우리를 순간순간마다 옥죄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아브라함이 하란 땅을 떠나던, 바울이 안디옥을 떠나던 그리하여 멀고 험한 길(long and winding road)을 가건 말건 그런 것은 눈에 안들어 오고 믿음의 전배들을 그저 성경 속의 잘 나가는 인물 정도로만 바라보도록 우리를 저들이 옥죄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나태함과 타성이 갈라디아서의 거울에 나타난 우리의 자화상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말씀 나누기를 마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란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과의 만남, 다메석 도상에서 바울의 예수와의 만남,, 가나안을 향해 아비 친척 본토를 떠나는 아브라함, 자신의 주무대인 안디옥교회을 떠나 그리스로 로마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 디딘 바울,,, 역사는 분명히 콩을 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웁니다.

– 기도 –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당신의 종 바울의 뇌세포와 그 입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당신의 뜻을 제대로 분간해냈는지 아직도 모르지만, 포기하지 않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허락하신 삶을 다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날 때, 나로하여금 가야 할 본향이 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벗들과 나눈 당신의 말씀 – 아무것도 된 일이 없는데 된 줄로 안다는 것이 나를 속이는 일이라고 주님 당신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된일이 없는 것을 다 된 일이라고 아는 어리석음을 우리로 하여금 범하지 않게 항상 깨어 있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하나님 당신을 알려고, 당신의 뜻을 알려고 당신께서 내게 허락하신 감각기관과 이성작용을 사용합니다.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의 감각기관과 이성작용과 생각작용을 지키시어, 바울이 베드로를 향해 내 뱉었던 콩은 콩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열정을 우리의 가슴속에 심어 주시기를,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 연보 –

각자 알아서 이웃, 자선 단체, 암 연구소 같은 사람 살리는 기관을 향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구역예배 8/18 2011”에 대한 4개의 댓글

  1. 설교문을 읽으면 비겁하게 그냥 물러나지 말고 반드시 댓글을 남겨달라고 하시기에 주제넘은 글인줄 알면서도 여기에 올립니다. 또 이곳은 어느 교회 홈피가 아니기에 약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설교 말씀에대한 댓글을 답니다.  
    이 설교 본문은 너무나도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구절이지만 막상 우리에게는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적용하기 어려운 구절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해하게 되는 날이 있을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여기 까지 왔습니다.
    오늘의 설교 말씀을 읽고 무언가 하나 돌파구를 찾은것 같은 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별을 준비하면서 이글을 쓰게 되었다는 말씀이 상당히 신선하게 느껴 지는군요.  사실 신약 성경은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가 독판을 치게 되었는데 제게는 늘 그것이 궁금한 사항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직접 가르친 제자들은 이 신약 성경을 쓰는데 기여하지 못했는가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율법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는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을 인정하기에는 역시 인간적인 한계가 있은것이 아닌가를 아울러 생각하게 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성취 되는군요.
    오늘 희미하게 나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 구절의 한 벽돌을 들어낸것 같아서 아주 기쁩니다.  설교자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앞으로도 좋은 설교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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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 역시 똑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복음서면 되었지, 서신서는 왜 필요했을까?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 하나씩 하나씩 다시 살펴, 과연 바로 알고 있는가 – 공교롭게도 복음서보다는 바울 서신으로 부터 푯대를 바로 보고 가야한다는 말씀을 인용하네요 – 불행하게도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해야만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제 판단에, 기존의 설교자들의 책임이라고 여깁니다. 과거의 설교자들은 그들의 지적 능력 내지는 열악한 학문탐구 환경으로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요즈음의 그들마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합니다.
      또한 학문, 특히 과학과 고고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해 성경의 상당한 부분이 재해석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푹신한 교회 사무실 소파에 몸을 묻어 놓은 채, 교회당이나 지어 이웃 교인들을 통째로 sucking하여 같은 교역자들의 밥통을 끊어낼 궁리만 하고 있으니,,
      로마서에 보면, 이 아름다운 동산을 보고 하나님이 계심을 판단해 낼수 있는 능력의 보유자인 너희가 (신학이 없어서 몰랐다, 성경책이 해괴하게 번역되어서 몰랐다, 나는 태생적으로 공부를 못하여 독해력이 떨어져서 그랬다 등등 때문에) 나의 뜻을 몰랐다라고 핑계치 못하리라고 쓰여 있으니, 가는 세월은 지옥으로 가는 특급열차요, 사는 세상은 오도가도 뛰어내리지도 못하는 아비규환의 화물칸이니,, 오호라 곤고하다.
      부디 바라건대, 이곳에서, 아니면 다른 곳에서, 그곳이 교회이면 더욱 좋으련만, 깨어 있는 신앙의 동지를 만나 하나님의 바른 뜻, 이 세상에서 잠깐 살다간 독생자의 하늘 아버지를 향한 꿈을 조금이라도 알다가 가는 것, 비록 우리가 아비규환의 지옥행 특급열차 화물칸에 실려 질주하더라도, 내 그것만큼은 포기 못하리라.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께서도 설교를 한번 준비하심이, 그리하여 같이 나누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사실 우리는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들입니다.(그들이 나가라고 직접 말한적은 없습니다)  이유는 교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콩은 팥이 팥이 될 수 없고 그냥 콩이다, 님의 말씀 “어느 교회 홈피가 아니기에 약간은 홀가분한 마음” 에서 님께서 느끼셨던 내 목을 누르던 멍에를 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한다, 진리는 커녕 일어난 사실만을 말해도 “은혜스럽지 못하다” 단 한마디로 일축해버리는 기존의 교회 담벼락 안에서는 내목의 목재재질 멍에가 금속재질의 멍에로 완만히 화학작용해감을 보고 있는/을 수 밖에. 
      교회의 게시판은 온통 “목싸아님” “은혜” “기도” “성령” “뜨거워” 라는 쓰레기말로 차고 넘치며 어떤 교회는 아예 게시판을 없애버리지를 않나 어떤 교회 게시판에서는 읽는 것 조차도 승인받고 글 읽으라고,,, “주는 대로 먹어, 대들지마!!” 이런 식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 한 생명을 모조리 질식사 시키고 말겠다는 발상, 하나님은 그들을 내어 버려 두십니다. 찍으려고 하는 황새도, 않찍힐라고 발버둥치는 우리같은 우렁도 그냥 아무생각없이 찍히고 마는 우렁도 모두 다 그대로 살다가 그렇게 죽으라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어 버려두사.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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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감사합니다.
    이 글을 무단으로 옮겨 가도 될까요
    물론 안된다고 해도 저는 용감하게 퍼가렵니다.
    옮겨간곳은 ‘성경닷컴‘ 입니다. (야후,네이버에 검색해도 뜬다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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