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짖선지자 하나냐 – 구역예배 7/30 2011

– 찬송가 515장 –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아멘

 

– 설교 : 말씀 나누기 –

오늘 본문말씀 예레미야 28장은, 당대의 두 선지자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설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요시아대왕 치세때 선지자로 데뷔한 인물입니다. 다윗은 가장 위대한 왕이지만 오늘날 한국교단에서 만큼은 그 말을 유보해야 할 듯 싶습니다.

간간히 메이져 신문의 사회면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하는 목사들의 성범죄에 대해 동업자로서 교인들의 반감을 누르기 위한 베스트 예제가 가장 확실한 인물 바로 다윗이고, “다윗도 그랬지만 봐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인물아니냐” 실제로 이러한 말을 다니시는 교회에 출석하는 목사가 생면 부지의 목사를 강단에서 두둔함을 가끔은 경험하셨으리라. 그래서 필자는 요시아를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습니다. 예레미야의 이야기 속으로 가 보십시다.

예레미야 28장

1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 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 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 곳으로 가져오게 하겠고 4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

5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에 선 제사장들의 앞과 모든 백성 앞에서 선지자 하나냐에게 말할새 6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되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 예언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집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다시 옮겨 오시기를 원하노라 7그러나 너는 이제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들으라 8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9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10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11모든 백성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길을 가니라

12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3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신다 하라

15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으로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16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을 하였음이라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17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칠 월에 죽었더라

예레미야는, 그렇게 위대했던 요시야대왕의 허무한 종말을 목격하고, 슬픔의 노래 Lamentaion – 애가를 지어 기록으로 남긴 인물입니다.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요시아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석달만에 애굽의 친위세력에 의해 폐위당합니다.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 셋, 그는 애굽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그의 형제 “엘리야김”은 애굽의 친위세력들에 의해 여호아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유다의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여호야김 역시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됬지만 다시 잡혀갔고, 이어서 등극한 여호야긴의 숙부 시드기야는 자식들이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목도해야만 했으며 결국 두눈이 뽑힌 후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이 모든 엄청난 사건들을 예레미야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점령군이 포로로 잡아갈 때 그냥 사람만 잡아간 것이 아니고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기물까지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텅텅빈 성전을 예레미야는 성전이라 말하지 않고 그냥 “여호와의 집(the house of the LORD)”이라 표현합니다. The House 가 아니라 the house라고 하여 구역예배의 주된 장소인 일반 성도의 주택 정도의 표현을 쓰는 것으로 봐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성전(The Temple)의 처참했던 모습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 어둠의 세월을 살아 갔을까?

강가에 앉아 과거 잘나가던 왕국시절을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포로의 신세 한탄과 그 아름다은 성전 마당에 서 있는 예레미야의 심정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거 그들의 선조 므낫세 시절에 무참히 흘린 순결한 백성의 피에 대한 혹독한 댓가(왕하 24:3-4)를 지금 예레미야가 그 성전 앞마당에서 떠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징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선지자 하나냐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대단히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과 백성들 앞에서 이것이 내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메세지이다, 들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메세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인 내가 바벨론 왕이 너희에게 씌운 멍에를 꺽었다, 느부갓네살이 가져간 모든 성전의 기물을 2년 안에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것이며, 모든 포로들을 귀환시키겠다, 이것 역시 내가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꺽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말을 듣고 있던 예레미야가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다음처럼 응답합니다.

“아멘, 하나냐 당신이 예언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나는 원한다. 나와 당신 이전부터 선지자들은 자금의 전쟁과 염병을 이미 예언해왔다(8절). (그들의 예언이 지금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평화를 예언하는 (당신같은) 선지자는 그 평화가 오고 난 후에야 그가 여호와가 보낸 참 선지자인지 알 수있을 것이다.”

8절 므낫세 시절 부터 있어 왔던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에 대해 우리가 지금 그 댓가를 치루고 있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의중입니다. 그런데 하나냐는 죄에 대한 아무런 댓가없이 폭삭망해버린 이 나라를 구원하겠다고 한다, 어떻게 댓가 없이 그것이 가능한가 라고 예레미야가 하나냐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완전 폭삭 망한 나라에게 “평화”란 망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하며 평화가 오고 난 후 즉 원상 복귀된 후에야 비로서 당신이 참 선지자인지 거짖 선지자인지 알 수 있다는, 같은 선지자 계급장을 달고 있는 예레미야의 그러한 논조의 변은 하나냐의 자존심을 깡그리 무너뜨리기에 충분합니다. 이에 화가 난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걸린 멍에를 걷어내 부러뜨려 버립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여러분들 보셨지요?! 예레미야의 목에 걸린 멍에를 내가 부려뜨리는 것 보셨지요, 하나님께서 두해 안에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렇듯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으려 몸부림쳤던 하나냐의 이 같은 말을 들은 예레미야는 쓸쓸히 여호와의 집 대문을 나서 “내 갈 길을 말없이 가련다” 라고 말하면서(?) 떠납니다.

여기서 바로 멍에(yoke)가 우리들의 명확한 성경읽기에 걸림돌이 됩니다. 도대체 누가 멍에를 메고 누가 안메고 누가 제조하고,,,,,,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는 과거 을사늑약 이후에 우리기독교도에 가해졌던 신앙생활의 변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교회의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서울역 앞 남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던 왜놈들의 산동네 잡신을 모신 신사를 향해 고개를 숙여 뭐라고 중얼거린 후에 예배순서를 진행했던 일을. 이름하여 묵도,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 그 자체이어야 할 우리의 예배 순서에 끼워 넣어야 했습니다.

교회만 그랬겠습니까? 학교에서, 면사무소에서 등등 사람들 모이는 장소에선 거의 예외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나의 나됨” 즉 주권을 빼앗기면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굴종입니다. 즉 왜놈들의 하사품인 신사참배라는 독배를 들이킴으로 노예의 멍에를 메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관학교 재학생이거나 이미 졸업하여 현역으로 복무하는 장교의 결혼식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신랑의 동료 선후배들이 생도시절 입었던 화려한 제복에 까만 색에 짧은 챙 그리고 일반모자의 두배 높이의 모자에 큰 새의 기털이 달린 모자를 쓴 장대한 생도들이 두줄로 주-욱 늘어서 서로를 향해 45도 각도로 칼을 뽑아 들어 터널을 만들고, 신랑 신부가 그 밑을 통과 식장에 들어가고 나올때도 그 터널을 통해 나오는 장면, 여러분 기억 나시죠?

일반 예식장에서도 칼은 아니지만 꽃으로 장식된 터널 같은 것을 준비하는 데 비슷한 경우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다른 두사람이 만나 화합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상대에게 굴복시켜 화합했다” 라는 의미입니다. 뭐 간단하지요, 두사람 즉 두 집안 사람들이 만나 화합하기 시작했다,,, 그 터널로 들어가서 다시 나오면서부터, 즉 결혼식이 끝나고 부터는 공식적으로 세상에 두 사람이 화합했다라는 것을 공표하는 것, 새삼스럽게 필자가 다시한번 돌아보았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한가지 전통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이 위의 영화에서 처럼 늘어서서 칼이나 창으로 터널을 만들어 놓고 항복, 패배 혹은 사로잡힌 적군의 군사들을 그 밑으로 통과시키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이제 전쟁에서 우리에게 진 너희들은 이제 우리의 밥이다!” 이런 뜻이고 이것은 곧 노예상태, 즉 생사여탈권을 전쟁에서의 패배에 대한 댓가로 치루는 것을 감당하겠노라는 공식행사였습니다. 또한 두 민족이 합병, 화합한다는 뜻이지요. 승자에게서는 화합이란 말이 나오지만 패자에게서는 “나의 나됨”을 포기하는 포기각서입니다. 바로 여기서 패잔병 포로들이 터널을 통과할 때 머리위에 있던 칼과 창은 바로 멍에의 상징이었습니다. 멍에 즉 굴종이지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4절)라 함은, 유다 왕과 제사장에게 멍에를 항상 쓰고 있으라는 느부갓네살의 명령, 즉 “유대왕 자네가 나한테 항복했다는 것을 증명해봐라” 입니다. 이를 거부함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멍에는 정복당한 유다와 왕실과 제사장이 느부갓네살에게 굴복했음을 만천하에 인정하는 상징물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약속의 아들 이삭의 맏아들이었던 에서에게 조차 이 멍에를 씌우셨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전쟁에서 패했다, 그래서 승전국에게 복속되었다, 교과서에서만 눈으로 읽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 상황에 이르면, 나의 나됨을 포기하고 왜놈들 산동네 잡신에게조차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참극을 어쩔 수 없이 생활화해야함에 소름이 끼칩니다. 이런 이유로 바보스쿨 바보들의 이야기 코너에 번역된 순교사화의 주인공 폴리캅 주교, 한국의 주기철 목사 이들이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 굴종의 멍에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 팔아 먹고 이삭으로부터의 축복권까지 사기당했음을 비로소 자각한 그 때, 자초지종을 들어 아버지 이삭에게 항의하자 이삭은 ‘에서 너는 야곱의 종이 될 것이며 그것이 끝나는 것은 네 목의 멍에가 벗겨질때’ 라고 창세기 기자는 이삭의 에서를 향한 애끓는 부정(父情)을 기록했습니다.

27장 서반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러한 의미의 멍에를 만들 것을 명령하시며 또한 그것을 각 나라에서 시드기야 왕을 알현하러 오는 외교사절들에게도 주어 그들도 메게하며 너도 메라, 그 이유는 너희들이 느부갓네살에게 복종해야만하는 내가 내리는 징벌의 표시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메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을 사용하여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진멸하신다고 까지 합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다. 어린시절 우리 동네 들녘에서 흔히 보던 논밭 갈던 황소의 목덜미에 걸려 있던, 황소의 운동에너지를 쟁기에 전달하는 모멘텀이 되었던 멍에, 그 멍에를 외교사절과 예언자 및 궁중관료들이 메고서 역시 같은 멍에를 메고있는 왕 앞에 주-욱 늘어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성경의 기록대로 이것은 실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필자는 이대목을 읽으면서 푸-하-하-하-하 푸-하-하-하-하 성경에는 이러한 절묘한 코메디 소재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최고의 희극은 최고의 비극에서 나옵니다.

바로 이 멍에가 오늘 본문 말씀 예레미야 28장의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다툼의 소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요시아대왕 때부터 이어지는 왕들의 실패와 그보다 훨신 앞선 선대 왕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예레미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유다의 선조들의 죄로 인한 징벌에 대한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멍에를 아직은 메고 있을 때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냐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백성들을 향해 대단히 희망적인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백성들의 귀가 솔깃할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음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27장에서, 하나냐와 같은 말을 하는 선지자나 요술객이나 점쟁이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그런 말을 하는 선지자를 요술객이나 점쟁이와 같은 격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하나냐의 예언을 거짖이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다 이루어졌으니까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두해(2년)안에” 라고 하나냐가 말하여 아예 시간 까지 확정해버려 70년후에 이루어 내신(29장) 하나님을 너무 앞서가지는 않았을까 하고 켕기기는 합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냐는 목재로 제조된 멍에 대신 금속재질의 멍에를 메게 되었고 그 해에 죽었습니다.

약 2600여년이 지난 이시대를 살아가는 필자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28장은 예레미아 전체의 중간부분인데 앞서서 이미 수차례에 걸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대항하지 말고 포로로 순순하게 끌려가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라는 메세지를 백성과 제사장 그리고 (시드기야)왕에게 전했습니다. 누구인들 바벨론 프락치 – 예레미야로 간주하지 않았을 수가 없었겠지요.

면허쯩 소지 유자격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방법을 동원하시어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는 해석을 주로 내놓습니다. 이처럼 편리한 발상이 어디 있을까? 말문 막히기만 하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방법을 동원하시,,,” 이제는 설교가들도 공부를 더 하셔야 합니다.

예레미야서가 쓰여진 시점은 훨씬 그 이후이고, 자신들 외에는 모조리 이방(pagan) 외계인으로 간주하는 유대인들, 바벨론 유수에 대한 그들 고유의 역사관을 의심해보기도 했습니다.

의기소침해진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메세지를 거침없이 쏟아내며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하나냐,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뒤덮고 있던 화려한 허상을 실상으로 보았던 하나냐.

의기소침해진 백성을 향해 그냥 이대로 가는것이 하나님의 메세지라며 반역의 자세의 예레미야, 그러나 그의 통찰력은 본체를 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냐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누구의 말이 더 듣기 좋았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복, 자녀대학복, 남편승진복, 아파트 당첨복 등등 수 많은 복을 시종일관 되뇌이는 교회는 터져 나갑니다. 그러나,

오늘 이곳에 오신, 미노리디(minority)의 삶을 마다하지 않고 깨어있는 교우들은, 왁자지껄 빨렐루야 아멩 믿쓥니다가 연발되는 하나님의 집이라 저들이 일컫는 교회당 주차장을 또 한번 쓸쓸히 빠져 나옵니다.

오늘날의 예레미야는 남의 지하실 삯월세 방에서 두서너명 앉혀 놓고 이 말씀 가지고 통곡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필자만의 생각 -> 그런고로, 단 0.1%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에, 우리는 반드시 헌금 나누어야 합니다. 바벨탑 모기지 이자상환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 뒷부분에 집이나 지어대는 철딱서니 없는 시드기야 이야기가 나옵니다.)

필자 역시, 예레미야의 반역이냐 하나냐의 저항이냐, 반역과 저항 이것이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뒤덮고 있는 허상이라면 그 본체는 “하나님보다 앞서나간 그리하여 초절정 인기를 구가하던 하나냐, 비록 왕이 백성이 제사장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거북한 하나님의 말씀을 때마다 전하여 인기는 고사하고 천덕꾸러기 신세의 예레미야”.

역사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목격한 예레미야는 자신이 해야만 했던 말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냐가 한 나라의 왕임에도 메어야만 했던 멍에를 예레미야의 목에서 걷어내는 그 순간에도, 여호와의 집에 있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최소한 침묵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냐와 “믿쓮니꺄↗ 아멩–빨렐루야↘”를 연발하며 손발을 척척 맞추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성경은 침묵하지만,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성서기자가 두번씩이나 쓴 것은 아닐까요. 27장 9절에 “너희는(즉 백성은, 오늘날로 치면 성도는) 듣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필자는, 예레미야와 하나냐간의 설전을 지켜보면서 수모를 당하는 예레미야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이 그 자리에 앉아 계속 하나냐와 격변의 중동과 유다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묻고답하기를 즐겁게 계속 진행하거나 혹은 침묵으로 무언의 지지를 보낸 제사장과 백성의 태도를 우리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듣지 말라”. 즉 하나냐와 제사장들이 있던 그 자리를 피했어아 마땅했습니다.

역사를 통해 운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흐름을 탁월한 통찰력으로 꿰뚫어보던 예레미야 그러나 하나님의 집을 쓸쓸히 홀로 빠져 나가야만 했을 정도로 대중의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은 예레미야, 당대의 백성들에게 인기있었던 그러나 여전히 선지자인 하나냐, 그리고 멍에.

비록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간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않게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우리를 향한 징벌 혹은 책임을 자각하지 못해 댓가를 치루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한낱 교설 혹은 지리산 솔입점집 처자가 아침저녁 중얼대는 주문밖에는 안된다라는 예레미야의 메세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메아리쳐 옵니다. 일제강점, 신사참배, 해방,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의 희생을 요구한 혹독한 군사독재 그리고 광주학살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던 오늘의 한국 교회당에 예레미야의 통찰력을 가진 선한 목자는 쓸쓸히 교회당을 떠나고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언제나 마이너(Minor)의 삶을 살았습니다. 왕과 제사장 그리고 백성들은 그들 선지자들이 입만 열면 인상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모스 호세아 미가,,, 선지자들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는 뒷부분에 보니까 진흙 구덩이 던저져 죽을 지경에까지 갔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좁고 협착한 길”을 거꾸로 예레미야가 갔던 길에서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설교 끝.

– 기도 –

오늘, 민족에게 반역의 메세지를 전하며 소수의 삶을 살아갔던 예레미야의 삶의 짧은 한 단편을 읽고 벗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나는 한편의 글을 썻지만 이글을 읽는 벗들의 마음에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킬 것임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부디 당신의 뜻, 예레미야를 통해 보이시려 했던 그 뜻, 우리가 지은 죄의 댓가를 치루지 않고서는 굴욕과 굴종의 삶을 청산할 수 없으며 나의 나됨을 포기할 수 밖에 없음이 당신의 뜻이라는 것을 나누기를 바라오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늘을 찌르던 인기의 하나냐에게 예레미야가 수모를 당할 때, 거짖 선지자가 하나님 당신의 메세지를 가지고 장난 칠 때, 그 앞에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예레미야를 떠나 보냈던 무리가 오늘 우리들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맑은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앎에 있어 우리의 나태함과 무지의 죄를, 내 삶의 주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당한 십자가의 형벌의 공로로 사함 받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연보 –

각자 이웃의 작은 교회로, 혹은 자선 단체로.

“거짖선지자 하나냐 – 구역예배 7/30 2011”에 대한 5개의 댓글

  1. 참석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예레미야, 이 성경을 본문으로 삼는 설교는 거의 들오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고작 33장 3절, 크고 비밀한 것을 보여주겠다 이 말씀만이 간판이된 비운의 성경책(?)이랄까요.
    “구역예배” 게시판 공지글에 쓰여 있다시피, 우리들은 생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매주 혼자서 설교문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혼자서 해가면 혼자만의 생각만 전달될 것입니다. 그것도 지속적으로요.
    더 이상의 말씀은 제가 지금 설교문 준비 하면서 써둔 소고에 덧 붙여 다시 글을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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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구역 예배에 참석할수 있어서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어떤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설교자의 설교는 어떤 체증을 씻어내는 그런 시원함이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이해하는 수준에서는 약간 어려운 내용인것 같은데요. 이시대의 하나냐와 예레미야를 분별할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구역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참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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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예나 지금이나 minor 는 항상 있었지만,  52 장에 걸친 방대한 분량과
    강한 멧세지에 매료되어  대선지서 예례미야도  minor 선지자인것을 간과 했었군요.
    하나님을 경외하는자들과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자들은
    항상 기득권들로부터 외면 당할수 밖에 없는것임을 – – – – .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읍니다 . 
    요즘 교회의 대부분의 설교가 하나님을 대신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만 도용하여 내가 이루고 싶어하는 지가복음과
    교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축복복음만이 난무하는 시대에 ,
    시대와 교회를 향하여는 평신도들의 외치는  소리가 되고, 바보스쿨러에게는
    스스로를 권면하고 하나님의 뜻을 밝혀내려는 깨어짐이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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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사실, 이시대에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예레미야가 지금 쓴소리 비평일색으로 일관하고 있구나 아마 이런 생각하는 교인들 거의 없을 겁니다. 그 만큼 우리의 사고방식이 뒤틀려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같은 말이라도 예레미야가 하면 메세지 즉 예언이요 내가 하면 쓴소리 비평,,,,,, 분명한 것은, 모든 선지자들은 자신이 살던 동시대인에게는 철저히 무명 선지자였고 그들은 어디서나 “쓴소리 비평일색”만 일삼는 사람들로 비쳐지고 있음을, 같은 성경을 읽어가는 데 왜 알아차리지 못할까, 깨닫지 못할까?
    사랑님 오랫만에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조만간에 사이트에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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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듯이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이렇게 재미나며 뭉클한 설교를 대한지도 참 오랫만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늘 쓴소리 비평일색만 하기에 제발 그만 두라는 충고를
    하도 많이 들어서 혹시 내 심령이 황폐화 된것은 아닐가 은근 걱정 했었지만..
    나 아직 살았어요^^;
    저 만 읽기에 너무 아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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